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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Jan 27. 2019

[영화 에세이]#13. 세 번째 살인(2)

불신과 상실의 시대에서의 인간의지의 발현에 관하여

III. 맹인모상(盲人模像) - 장님이 만진 것은 코끼리이나 말한 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미스미가 증언을 계속 번복하게 되면서 진실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고 딸의 도둑질을 변호하던 시게모리는 딸의 눈물이 거짓임을 알고 적잖이 당황한다. 이해와 공감을 배제하고 변호 전략만 생각하던 시게모리는 점점 진실을 갈구하게 된다. 허나 미스미는 시게모니가 다그칠 때마다 주장을 번복하고 때마다 시게모니에게 묻는다. 무엇을 믿느냐고.(*)
    

* 미스미는 내연녀의 사주로 보험금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번복할 때, 사실 살인을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번복할 때, 자신이 사키에가 어려운 증언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증언을 번복했다고 생각하는 지를 물을 때 등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란 단순히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상황 속에 놓인 나 자신일 수밖에 없기에 언제나 어떠한 선택을 하는 동적인 인간이라고 했다. 이런 실존적 인간은 보편적인 진리보다 주관적인 실존을 기준으로 진리를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란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불확실성을 가진 것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계속 사고하는 삶의 주체성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츠는 현재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 설화에 비유한다. 커다란 진실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직접 만지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이해된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된 주관적 진실은 다시금 '말'로써 왜곡되어 서로가 옳다고 논쟁하기에 이른다. 장님들이 만진 것은 코끼리이나 말하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영화 <세 번째 살인>| 미스미는 말에 대한 불신을 표출한다.

 만짐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행위는 미스미가 시게모리의 손을 마주대면서 말하는 장면으로 이미지화된다. 미스미는 대화보다는 손을 맞댄 채 체온을 느끼며 상대를 이해한다. 미스미에게 ‘말’이란 믿을 수 없는 것. ‘말’에 대한 의심은 시게모리에게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스크린 위로 떠오르게 된다.     


 법정은 이러한 ‘말’들이 모이는 곳이다. 말에 대한 불신은 사키에의 대사로도 드러난다. ‘여기선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아요.’ 법정으로 모인 ‘말’들은 진실에 대한 접근은 상실한 채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다시 말해, 법정으로 제유된 우리 사회에는 믿을 수 있는 ‘말’이란 없다는 것. 그렇기에 불신은 영화 전체로 번져 끝까지 관객들은 완벽한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사키에는 미스미가 자신의 살인 의지를 전해 받아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누가 행한 살인인지는 끝내 알 수 없으나 사키에와 미스미는 살인에 있어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는 살인 장면에서 사키에가 미스미와 천변에 나란히 서서 얼굴에 튀긴 피를 닦는 모습으로 이미지화된다.

 한편 시게모리, 사키에, 미스미가 눈밭에 누워있는 장면을 살펴보면 옅은 발자국은 십자가를 형상화시킨 미스미와 사키에를 십자가 모양을 하지 않은 시게모리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는 시게모리의 아버지가 언급한 태어날 때부터 건널지 말지 정해진다는 살인자의 도랑을 떠올리게 한다. 즉, 태초에 사키에는 살인자가 될 운명이라는 것. 따라서 미스미가 범인이라면, 그의 살인은 심판이 아닌 사키에의 죄를 대신 행하고 짊어지는 대속(代贖)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는 마치 예수처럼 죄를 대신 짊어지는 미스미에게 구원자의 위상을 부여하원죄의 존재를 용납하게 한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영화 <세 번째 살인>| 옅은 발자국은 시게모리와 나머지 두 인물 사이에 경계를 짓는다. 또한 미스미와 사키에는 십자가 모양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미스미는 살인을 번복한다. 그는 30년 전의 살인 때문에 현재의 자신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죄를 떠받는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오컴의 윌리엄은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며 아담의 원죄가 만인에게 상속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회는 '말'로 가득한 세계라 미스미가 과연 사키에에게 도움을 주려고 살인 여부를 번복했는지는 알 수없다. 다만, 미스미는 번복을 통해 원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죄의 상속을 거부한 채 우리가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를 계속해 묻는다. 이렇게 두 번째 살인의 범인을 찾는 행위는 원죄의 존재 여부 즉, 보편 논쟁을 함의한다.
      

* 오컴의 윌리엄을 모티프로 한 <장미의 이름>에서 독이 묻은 책으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지식을 경계하고 의심 없는 믿음을 풍자한다. 우리는 영화가 마칠 때까지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진실의 불확실성을 인정한 채 영화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주관적인 진실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IV. 자유의지 - 두 번째 살인으로 가려진 세 번째 살인


 그렇다면 원죄의 존재 여부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살인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을 떠나 미스미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관객들이 두 번째 살인에 현혹된 사이에 영화는 세 번째 살인을 자행한다.


 시게모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며,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게모리가의 부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 반면 미스미는 인간은 인간의지와 상관없이 생사가 결정되며 본인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부당하게 목숨을 빼앗긴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서 미스미는 격렬히 몸부림친다.  자유의지를 관철하며 시게모리의 결정론 의문을 던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생사가 결정되는 세상에서 미스미는 살인을 통해 실존을 드러내려 한다. 미스미는 항상 심판받는 입장으로 살아왔다. 그는 본인의지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남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가 죽는 동안 지금껏 그는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 남겨진 것일 뿐. 그렇기에 그는 목숨을 좌우하는 일을 동경한다. 그는 살인으로 자신이 타인의 목숨을 다룰 수 있음을, 그로써 그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보이려 한다. 허나 그는 단지 텅 빈 그릇처럼 타인의 감정을 담아 살인을 저질렀을 뿐. 이는 진정한 자유의지의 표출은 아다. 


 그 살인으로 인해 미스미는 심판을 받게 되고 법정에 서게 되며 자유를 구속당한다. 미스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인한 살인이자 자신을 더 이상 심판받지 않게 하고 자유를 구속당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기자신을 살해하 이라고 결론짓는다. 자신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본인의지 없이 태어난 미스미는 본인의지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살인이며 이는 미스미를 사형으로 이끌려는 검찰 측의 빈자리를 채운다. 이로써 비워져 있던 검찰 측의 숫자 '3'은 미스미의 사형으로 완성된다.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두 번째 살인은 중요하지 않다. ‘사키에의 아버지를 살인한 사람이 누구인가’로 비유된 원죄에 관한 명제 자체가 맥거핀으로 작용하는 동안 미스미는 보편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을 살인하여 실존을 외치는 것이다.   

   

영화 <세 번째 살인>

 헌데 미스미의 자살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사키에가 증언을 하지 못한 것과 미스미의 살인 여부 번복을 인정함에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시게모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말과 의도를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미스미를 사형에까지 이르게 한 것. 즉, 세 번째 살인은 미스미의 단독 살인이 아니라 시게모리의 공모 공동 살인이다. 재판이 끝난 후 붉은 햇빛이 얼굴로 쏟아지고 그 햇빛을 손등으로 닦은 후 지긋이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시게모리는 살인에 동참하게 되고, 이로써 세 가문의 피의 연대가 이루어지며 살인의 자유의지는 개인을 넘어 인간군상 전체로 확대된다.

영화 <세 번째 살인>

 하지만 이 살인은 시게모리에게 불안을 야기한다. 미스미의 세 번째 살인에는 결함이 있기 때문. 그가 완성시킨 법정은 '말'로 가득한 곳이고, 그의 죽음과 무관하게 법정이라는 체제는 유지된다는 점. 어쩌면 미스미 역시 세 번째 살인마저도 온전한 자유의지의 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죽이고 묻은 카나리아의 무덤이 아닌, 세상에 날려 보낸 카나리아를 동경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가 진정 원한 자유의지는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의 자살이 아니라, 그런 세상에 내던져져 발을 내딛는 것일 수도 있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면회실을 찾아가고 카메라는 시게모리와 미스미를 유리창을 통해 중첩된 이미지로 나타낸다. 하지만 시게모리가 미스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둘의 이미지는 이격을 가지게 된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말’과 사키에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시게모리가 믿었던 진실은 코끼리를 만진 장님의 말처럼 왜곡된 진실일 수밖에 없다. 시게모리는 자신이 어디를 만지고 있는가를 궁금해했으나 그가 만진 것은 실체가 아닌 코끼리를 만진 사람의 부유하는 언어일 뿐이었다. 이때 또다시 미스미는 시게모리에게 묻는다. 무엇을 믿느냐고.


 사르트르는 선택할 자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습관을 '나쁜 믿음(mauvaise foi)'라고 칭했다. 또 인간은 세상에 피투 된 존재이며, 그렇기에 자유롭고 스스로를 기투하는 존재라고 했다. 면회실 밖을 나온 시게모니는 어느 사거리에 멍하니 서있다. 드디어 시게모리는 법조계로 제유된 ‘말’로 가득한 세상에 피투 된 대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지, 어떤 의지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선택의 기로 위에 서있다.

영화 <세 번째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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