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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Feb 18. 2019

[영화 에세이]#14. 콜드 워

세차게 흔들리는 세상에 짙게 내려앉은 운명 같은 사랑

세차게 흔들리는 세상에 짙게 내려앉은 운명 같은 사랑



 운명과도 같은 사랑이 내려앉은 적 있던가. 예컨대 붉은 천을 마주한 황소같이, 해안에 묶인 선박이 목도한 거대한 해일같이, 혹은 하늘을 검게 드리우는 폭격기를 올려다보는 것같이. 사랑은 어쩌면 그 자체로 강렬하다. 온전히 치명적이다. 특히나 유리알같이 맑은 사랑에게는 더더군다나.


 쉬이 마주할 수 없는 사랑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믿는다. 언젠가는 이런 사랑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어쩌면 열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사랑이 생애 단 한번 찾아올 운명이었을 수도. 혹은 운명이라 생각지 못했던 사랑이 돌이켜보면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운명은 선명할 수도 혹은 모호할 수도, 허나 찬란하게도 우리에게 다가올 터이니. 이렇게 우리는 모두 운명적인 사랑을 고대하고 한줄기 희망을 가슴에 담는다. 비록 짙게 어둠이 깔려있는 세상일 지라도.


 허나 사랑은 손쉽게 이용당하고 흔들린다. 사랑을 할 때면 우리의 눈은 멀게 되니까. 사랑에 빠진 우리는 가장 커다란 기표도 보지 못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만 한다. 가까이 다가서더라 도저히 아무것도 직시할 수 없고 어떠한 손짓마저도 외면하게 된다. 결국에는 어떠한 불빛이 나를 비춰주기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불빛에 홀린 불나방처럼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사랑. 쉬이 발 내딛기 어려운 흑백의 세상에서 이런 사랑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어일까.


* 시력검사에서 가장 커다란 시표를 읽지 못하게 되면 점차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5m용 시력표 기준 50cm까지 다가서도 가장 큰 기호를 읽지 못하면 그다음은 손가락의 숫자를 세고(finger count), 손의 움직임을 보게 되고(hand movement), 마지막으로는 빛을 감지할 수 있는 지를 보게 된다.(light perception)
영화 <콜드 워>| 어쩌면 세 가지 'Dwa serduszka, cztery oczy'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 아닐까.

 <콜드 워>(2018, 파벨 파블리코브스키)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한다. 실험의 주제는 '사랑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곳이란 과연 어디인가.' 실험은 두 주인공을 독립변수로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을 읊는 민요, 'Dwa serduszka, cztery oczy(Two hearts, four eyes)'를 종속변수로 하여 이루어진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은 두 주인공이 만나는 순간뿐이며 이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헤매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함께 있는 순간만 관찰할 뿐. 이런 형식을 통해 감독은 장소를 옮겨가며 이곳저곳에 인물들을 점적한다. 인물들을 놓아보면서 과연 어느 시공간에서 사랑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감독이 설정한 공간에 느닷없이 등장하게 된다. 예컨대 서로 약속하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파리의 술집에서 빅토르는 줄라를 기리고 있다던지.


 실험은 폴란드에서부터 진행된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자 분할통치를 겪 후에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되기도 했던 이 갈등의 최전선인 곳. 영화는 민속음악을 수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정뱅이들의 음악부터 술집의 음악을 거쳐 어느 소녀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허나 온전히 순수를 담아낸 음악들을 취하는  이어지는 장면은 당의 간부 카치레크가 성당으로 들어서는 장면. 심지어 이 장면에선 눈밭에 서서 오줌을 누는 쇼트가 삽입되기도 한다. 이는 순수한 공간으로 향하는 이념의 침투를 말한다. 이렇게 가혹한 실험이 막을 열게 된다.


 폴란드에서 빅토르와 줄라는 처음 만난다. 빅토르는 첫눈에 줄라를 마음에 품고 자신의 방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소련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쇼스타코비치'를 은연중에 비춘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작품이 자신의 뜻과 다르게도 선전 음악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후기에 재즈를 도입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가 실행하는 실험과 빅토르의 삶은 쇼스타코비치에 비추어 진행된다. 이 장면은 영화가 수행할 실험의 프로토콜(protocol)을 제시한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공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했다. 그중 독일군 주력 집단인 중부 집단군(제2,3 기갑 집단)은 소련의 상징적인 도시인 레닌그라드를 공격하게 된다.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때 그는 교향곡 제7번을 작곡하였다. 이 교향곡은 후에 공산당에 의해 '레닌 그라드'라는 제목이 붙게 되고 승리를 기원하는 음악으로 사용되곤 했다. 한편 쇼스타코비치는 프랑스 등 서방 세계에 연주를 하러 다니거나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고로 작품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왔던 초기와 후기에 주로 국한되지만 재즈의 형식이 작품에 도입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Jazz Suite No.2 - Waltz'가 있다.
영화 <콜드 워>| 줄라의 뒤쪽으로 선반에 얹힌 쇼스타코비치의 사진이 보인다.

 실험은 좌파 이데올로기부터 시작한다. 스탈린주의에서 민요는 합창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는 이념의 선전을 위해 사용된다. 이러한 곳에서 둘의 사랑은 온전히 존재할 수 없을 터. 빅토르는 이곳을 벗어나 망명하기로 한다. 허나 그는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예술계에서 꽤나 지위가 있는 반면, 줄라는 불어도 할 줄 모르며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결국 줄라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빅토르를 외면하고 빅토르는 혼자 떠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는 빅토르가 있는 파리로 줄라를 데려나,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무색하리만큼 짙은 키스를 남기고는 그녀는 떠난다.


 두 남녀는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다시 파리에 이른다. 허나 자유주의의 극단인 이곳에서도 민요는 번역을 당하고 재즈풍의 샹송으로 변모되어 미디어화 된다. 빅토르는 한껏 꾸미는 줄라에게 지금도 예쁘다고 하며, 줄라의 과거를 과장해서 퍼뜨리는 등 카치마레크의 행적과 닮아간다. 심지어 가사는 은유되어 '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라고 의역되기도 한다. 은유는 한 개념을 그 자체의 뜻이 아닌 다른 개념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우파 이데올로기에서도 역시 사랑은 온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 프랑스 제5 공화국은 1958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수립되었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파리는 드골의 집권하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당시 제4공화국은 내부의 분열과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드골의 재등장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영화 <콜드 워>| 관객에는 미리 암시되지 않은 장면으로, 빅토르는 줄라를 파리의 어느 바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며 마침내 줄라가 등장한다.

 어디에서든 그들의 사랑은 실패한다. 좌파든 우파든 민요는 미디어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된다. 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들을 찍는 이 영화 <콜드 워>조차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낯설게 하기(소격 효과)'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공간으로 전환할 때 내러티브는 의도적으로 연속성을 제거한다. 앞서 언급했듯 두 인물의 만남에는 아무런 복선도 존재하지 않고 줄라가 느닷없이 빅토르를 찾아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내러티브 마치 점프컷과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한편 다른 공간으로 전환될 때 무지 화면으로 암전을 한 후, 시공간을 지시하는 자막을 삽입하기도 한다. 이 역시 소격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작동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관객에게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거부하고 비판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끔 한다. 따라서 이토록 적극적으로 소격 효과를 드러낸 영화에서 관객은 응당 표면에 주어진 것 너머를 살펴봐야 할 터. 그곳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영화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 로맨스는 이데올로기의 주입하고 재생산하는 데에 가장 쉽게 사용되는 장르이다. 게다가 권위자 남성과 가난한 여성이란 얼마나 전형적 지배 이데올로기적 설정인가. 만약 이 영화가 고전 내러티브를 추구하며 오이디푸스 궤적을 완수한다면 성취가 이루어지게끔 한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데 쓰일 수 있다. 허나 이 영화는 낯설게 하기와 엔딩 장면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구속을 극복한다.


 결국 인물들은 민요가 태초에 존재했던 곳, 처음 영화가 시작했던 공간으로 되돌아온다. 그곳에서 그들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탈이데올로기'뿐. 그들은 혼인을 맺는다. 혼인 서약을 마친 후 그들은 약을 나눠먹고 벤치에 앉아 석양을 기다린다. 허나 잠시 앉은 후 이내 자리를 옮긴다. 경치가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가자면서. 두 남녀는 화면의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그들이 프레임 아웃을 통해 영화로부터 탈피하는 동안 카메라는 그들을 쫒지 못한다.(*) 정말 경치가 좋지, 경치가 좋은 곳으로 가다 쓰러지지는 않을지, 경치가 좋은 곳에서 부디 행복히 죽을 수 있었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영화에서 벗어나기로 했으므로. 다만 바람 불어오는 빈 배경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마치 반주 없는 여백의, 원래 모습 그대로의 음같은 바람이.


* 정보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콜드 워>는 수평 트래킹을 자주 이용한다. 예컨대 컷의 분절 없이 줄라를 비추다가 카메라는 슬그머니 패닝을 하고 그곳에는 문으로 들어오는 빅토르가 있는 식. 허나 엔딩 장면에서는 수평 트래킹을 사용하지 않는다. 앞서 자주 사용된 기법이 필요한 장면에서 사용되지 못하여 정보를 박탈한다는 점은 주제를 극대화시킨다.
영화 <콜드 워>| 인물들의 시선의 교차를 이토록 세련되게 표현한 영화가 있던가.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문정희 시인의 <목숨의 노래> 中)


신발을 신는 것이란 묘한 행위이다. 신발 신기는 끈을 묶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본디 한 줄인 신발끈은 마치 두 가닥처럼 보인다. 몇 번의 손짓으로 서로 스쳐 지나가던 두 가닥의 신발 끈이 비로소 목이 죄도록 엉겨 묶여야 신발 신기가 완성된다. 허나 아무리 운명처럼 맺어졌다 하여도 신발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자 정체성 혹은 이념을 상징하는 바인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모든 걸 내던지고는, 발가벗은 맨발로 타오르는 사랑은 도대체 어떠한 사랑일는지.


불빛에 홀린 불나방처럼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사랑이 있다면 불같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영화도 있다. 불이 켜지고 크레딧이 올라도 머릿속에 맴도는 선율은 뇌간에 박혀 목숨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박는다.

 'A ja chłopca hac! za szyję, będękochać póki żyję. (But I went for him anyway and love him until the end.)' - Dwa serduszka, cztery oczy 中

 나는 맨발로 다가갈 수 있을까, 벗지 못한 신발을 죈 신발끈에 걸려 고꾸라질까. 끝끝내 나란히 앉아 죽음을 기꺼이 초대하는 사랑이 내게 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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