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조 Mar 16. 2019

[영화 에세이]#16.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변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변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스무 살. 스무 살이 되어 갓 성인이 된 나는 성인으로의 자유와 쾌락을 누리지 못하였다. 어린 날의 실패. 어쩌면 이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커다란 실패를 목도하고 재수를 결심했으니. 얼마나 비장했던가, 그 당시 나의 꿈은. 나는 내 이름 석자를 드널리 알리고 싶었다. 예술이 아닌 수학에 골몰해있던 때긴 했지만 서도.


당장 코앞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것이 세상사라 섣부른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하였으나 향후 십 년간마음가짐만은 다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열 가지 인생 다짐을 세우고 최 십 년은 그 마음 변치 않기로 했다. 종이를 정성스레 오려 책상 머리맡에 붙이고 플래너의 맨 뒷면에 적어둔 채로 매일 같이 들여다보았다. 매일 밤 잠이 들 때면 십계명을 보면서 하루를 반성하곤 했다.


허나 이 또한 한순간의 치기였던가. 수능이 끝난 뒤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십계명을 적어둔 종이와 플래너를 잃어버렸고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십계명의 첫 구절도 기억나지 않으니. 비록 지금은 다른 꿈을 가지게 되었지만 무색해진 과거 다짐을 떠올릴 때면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하다. 나태와 굴복을 경계하는 글을 쓰면서도 실상 나 자신은 그리하지 못함에 부끄럽다. 이런 치욕스러운 상념이 우러날 때마다 곱씹어보게 되는 명제가 하나 있다, 변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영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3, 구교환)는 꿈에 대해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너져 내린 꿈을 다룬다. 영화는 배우 기환이 자신의 선배이자 감독인 준호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없이 앉아서 준호를 기다리던 기환을 기억해낸 직원은 이렇게 말을 건넨다. 감독님 전편에 나오시지 않으셨어요? 거지 맞죠, 완전 또라이인줄 알았는데. 기환은 자신의 캐릭터를 변호한다. '거지, 또라이 아닌데요? 김영호라는 캐릭터입니다. 영호의 심리적, 생리적 특징이 어린 시절 당한 트라우마,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의 기억 때문에 그렇게 된 거구요. 뭐 쉽게 또라이로 치부하기엔 아픔과 사연과 그리고 내적 갈등이 진짜 많은 친구입니다.'


준호가 오늘 오지 않는다고 하자 기환은 메모를 남기고 떠난다. 메모를 보아하니 기환이 준호를 찾아온 이유는 <생과 사의 밤>이라는 영화의 DVD를 받기 위해서이다. 그가 들고 온 체크무늬 쇼핑백에는 이미 많은 DVD가 담겨있지만 아직 못다 받은 DVD를 받기 위해 기환은 다시 떠난다. 이렇게 그의 여정은 시작된다.

영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기환이 느낀 참담한 심정은 아파트 건물만큼 갑갑했을까
영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울고 싶어서 기환은 양파를 깐다.

그 여정의 첫 번째 대상은 수염 선배이다. 영화는 숨, 호흡 그리고 성기라고 말하면서 허세를 부리고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음직한 로버트 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읽던 수염 선배. 그는 작품을 쉬지 않고 한다지만 치약을 파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 선배의 몰락이 못내 아쉬운 기환은 울기 위해서 양파를 깐다.


두 번째로는 김가의 세 쌍둥이를 만난다. 셋이 팀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각자 개인작업을 하기로 했다더라. 나쁘게 갈라선 것은 아니라 하더라. 허나 활활 타던 세 개의 연탄은 다 꺼지고 하나만 불길이 남는다. 그는 같은 팀이었던 이들에게 차마 연락하지 못하고 환에게 연락처를 줄 테니 전화해보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세 번째, 네 번째로 찾아간 인물들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이는 카와이 순지.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의 포스터를 벽에 걸어놓고 이와이 슌지를 꿈꾸던 순지는 디지털이 싫어서 아직도 필름 작업만 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광을 받았을 때의 코닥의 노르딩딩한 색감이 그리 좋다더라. 허나 노르딩딩하게 찍었던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 순지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못하는 척한다. 끝내 DVD를 주지 않으려는 순지. 잔뜩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DVD를 빼앗긴 순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 영화 하나로 나 판단하지 마.'


이들은 모두 변해버린 것이 부끄러운 것일 테다. 부끄러운 나머지 아직도 예술을 한다고 거짓말하고, 그러면서도 생업을 위해 치약을 팔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읊어대지만 정작 팀은 분열되어 연락조차 하지 못하고. 순지가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DVD는 어릴 적 찍은 영화의 저급함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영화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후벼 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반면 기환은 변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는 체크무늬 자켓을 잘 때조차 벗지 않으며 자켓과 닮은 쇼핑백에 자신이 걸어온 족적을 모두 담으려 한다. 허나 예술가는 어디 굶기만 하랴. 때때로 밥을 먹기도 해야 할 터. 헌데 가끔씩 밥을 챙겨 먹다 보면 문득 자신의 삶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우동을 먹다가 문득 쇼핑백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기환은 부랴부랴 지하철역으로 뛰어간다. 기어코 다시 쇼핑백을 찾았지만 다시 들여다보니 그것들은 남들에겐 쓰레기일 뿐. 하지만 그는 결코 체크무늬 쇼핑백을 내려놓지 않고 꿋꿋이 촬영장으로 가지고 온다.

영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이 영화는 체크무늬를 통해 세 가지 차원의 영화를 제시한다. 첫 번째로는 체크무늬 쇼핑백에 들은 주인공이 모으고 있는 DVD이다. 이는 기환의 삶의 조각들이며 이 영화의 내용은 간접적으로만 엿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각각의 에피소드이다. 각 에피소드는 체크무늬와 함께 등장하는 제목으로 구분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기환은 첫 번째 차원의 영화를 모으고, 그로써 자신의 메소드를 확립해나간다. 세 번째 차원의 영화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라는 영화 전체이다. 세 가지 차원의 영화 모두 기환의 영화이다.


기환은 체크무늬 자켓을 벗지 않음으로 연속성을 확보하며 두 번째 차원 영화들을 봉합하고 세 번째 차원의 영화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에 기환은 같은 대사를 말한다.'나 갈게. 이따 8시  차. 오지 마. 나 너 보면 되게 힘들 거 같아. 왜 울어. 내가 어디 뭐 죽으러 가냐. 갔다 올게.' 기환과 이야기하는 대상은 누구인지, 기환은 어디로 간다는 건지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이 발화의 청자와 구체적 내용은 끝내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장치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환이 같은 대사를 읊은 후 카메라는 줌 아웃하여 스태프들을 화면 안에 넣는다. 화면 안에는 영화 촬영의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는 우리가 보아온 것이 하나의 영화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허나 눈여겨볼 지점은 영화가 끝나고도 쇼핑백은 기환의 손에 들려있다는 점. 이를 통해 감독은 두 번째 차원의 다짐을 세 번째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아무리 하나의 영화에서 굳은 다짐을 하더라도 결국 과거의 다짐으로 남을 뿐이지만 촬영 후의 장면을 담는 것으로 다음을 기약한다. 영화를 위해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것. 그것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그의 삶이요, 메소드이기에.

영화 <왜 독립영화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에세이]#15. 봄날은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