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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절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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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May 10. 2020

일출과 일몰,  새로운 시작

항상 새해의 시작은 동해나 높은 산에 올라가 일출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찬란하게 솟구치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새로운 출발을 내 안에 선포하는 의식은 장엄한 제례와도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시선은 동해가 아닌 서해로, 1월1일이 아닌 12월 31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는 시간이 안타까워서일까, 아니면 오는 시간에 대한 막막함 때문일까, 발길은 해가 떠오르는 쪽이 아닌 해가 지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는 앞으로 남은 살아갈 날들마저 무겁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서럽기도 하다.


일출은 두근거림으로 시작하지만 왠지 모를 시작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이제 새로운 시간은 자유와 가능성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얼마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아둥바둥하는 초라한 인간은 새로운 한해의 밥벌이가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마흔이 넘어, 세상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부지였다. 세상의 중심에서 아무리 외쳐봐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난  겨우 우주의 한점일뿐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알게 되었다.  밖으로만 발산했던 어리석었지만 싱그러웠던 젊음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이제 내게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지만. 그들이 새로 시작하는 방식은 작년에 그랬던 것과 다르지 않다. 변화를 원하고 새로운 시작을 원하지만 정작 새로운 것은 없다. 그들이 택하는 것은 결국 익숙한 방식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껏 했던 모든 것들을 덮어두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제로 베이스(zero base)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꼭 범죄전과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나아가서는 생물학적으로도 우리는 과거에 철저히 구속되어 있다. 갓 태어난 신생아조차도 유전학적으로 이미 어느정도 불가항력적 과거를 지닌다. 우리가 택한 것이든, 택하지 않은 것이든 결론적으로 어제의 나와 절대적인 결별은 불가능하다. 익숙한 나와 결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


이번에도 한해의 마지막날 동해가 아닌 서해로 차를 몰았다.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다 위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2019년 12월 31일 제부도 일몰

일몰은 일출과 마찬가지로 아름답다. 단지 방향성의 문제다. 찬란하지만, 그 이후 이어질 적막함과 어둠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때는 그 시간들을 내가 가져서는 안되는 연약함이라고 생각해었다. 이제 그 적막함과 해가 지는 동안의 풍광이 내 가슴속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  들뜨지 않은 그 시간은 온전히 한인간의 고독속으로 들어온다. 니체가 말한대로 빛 속에서보다는 어둠 속에서 시간이 더 무거워진다. 가는 것들로부터 새로운 시작의 동기를 얻는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열어서 먼지만 날리는 썪은 상자를 들추는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려놓아야지 도약할 수 있고, 비워야지 채울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 또한 깨닫게 된다.


한해의 마지막 날, 잘 해왔다고, 스스로를 칭찬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읇조렸다. 다만 내가 아닌 것들은 이 바다속에 던져버리자 나는 소리치고 있었다. 부질없던 과거에 대한 집착과 후회에서 벗어나라고 해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바다로 가라앉히고 있었다.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시작은 과거의 나, 아니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는데 있다. 그런 나였지만, 이런 나였지만 괜찮다... 더 나아질 것이고 더 좋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해주는 시작이라는 단계에서 꼭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닌 것들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 역시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기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자. 단념하고 비워내자. 누군가가 말한대로, 큰 깨달음은 큰 체념에서 올 수 있다.   


일몰을 보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일출을 보러 나가는 대신 방에 앉아 오래된 잡동사니들을 정리했다. 다른 이들에 의해 혼탁하게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내 마음속 찌꺼기들도 함께 버려지기를. 미련하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을 버림으로써 그 속에 숨어있던 진짜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바로 그게 시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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