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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May 05. 2020

당신의 나무는 어디 있나요?

나는 있다.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 - 왈트 휘트먼(Walt Whitman)


"Thou art that!"

"너는 (결국) 신이다"라는 이 문장은 최후의 은유이다. 더이상 어떤 말로도 그 이상을 표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궁극의 은유는 여전히 내게는 텍스트에 불과했다. “신이 없다면 내가 신이다”라는 망언은 도스토예프스키 정도는 되야 가능한 얘기였다. 난 스스로에게 초라함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인 불확실함, 꿈의 부재 - 마흔살이 넘어 찾아온 사춘기는 지독했다. 3년 넘게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난 망가지고 있었다. 인문학과 글쓰기는 죽기전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몸부림이였다. 인문학은 이제 기술로는 힘들것 같아서 기웃거리기 시작한 동네였고, 글쓰기는 비용이 안 든다는 이유로 선택한 내 나름의 창조행위였다. 옹색했다. 좋아하는 것들이였지만 사실 난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죽기전에 한번은 꿈틀거리기라도 해보자 결심했고, 어떻게 인연이 되어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라는 곳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구본형 작가는 2013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키워낸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변화경영연구소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봄이 절정으로 내달리던 5월의 어느날, 충북괴산에 있는 여우숲이라는 생태체험마을에서 1박2일의 과정이 진행되었다. 비포장도로와 좁은 산길을 타고 올라간 그곳은 원시림처럼 나무들로 빽뺙했다. 오래전 사라진 여우를 기다리는 숲이라고 했다. 여우가 사라진 그곳에 이제 다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기술로만 아둥바둥하던 공돌이였던 내게 여우숲 교장 선생인 김용규선생의 강의는 신선했다. 선택이 불가한 인간의 태어남은 그 자체가 불완전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스스로 그것을 극복해 낼수 있는 자기력(自氣力)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신화와 연결된다는 내용이 숲과 삶에 대한 선생이 가지고 있는 통찰의 깊이만큼 묵직하게 다가왔다. 성즉리(性卽理). 모든 만물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시킨적이 없음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마는 이理는 씨앗의 발아와도 같은 것이다. 본성(本性)을 따르는 삶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선생은 우리에게 다음날 수업전까지 여우숲안에서 각자의 나무를 찾아보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나무의 성性과 나의 성性을 은유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졸참나무, 개똥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여우숲에는 셀수 없이 많은 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이름을 책속의 단어로만 알고 있던 내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소나무 정도뿐이었다. 나름 숲길을 돌아다니며 나무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나무가 그 나무일뿐 도무지 나와 같은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사실 말도 안되는 헛짓거리였다. 나무들의 이름도 거의 몰랐지만, 난 '나와 같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결국 지친 나는 대충 그럴듯하게 생긴 나무를 하나 골라서 녀석의 외양과 나의 닮은 점을 억지로 지어냈다. 면피용으로 과제를 후다닥 해치운 다음 강의실로 돌아왔다.  


후속 강의와 토론은 밤 늦게까지 이어졌고, 새로 만난 사람들과 술도 한잔 하다보니 새벽 3시를 넘겨 잠자리에 누웠다. 장시간 수업으로 인해 디스크로 고생중인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지만, 머리속에는 정리되지 않는 여러가지 상념들이 가득했고, 이성적으로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피로나 풀어보려는 요량으로 그냥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얼마를 뒤척거렸을까, 갑자기 밖이 환해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새벽 4시30분이었다. 통창문 밖으로 말갛게 일출의 기운이 느껴졌다. 엉거주춤 옷을 주워입고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새털구름에 가려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샛노란 해가 산과 산사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우숲에 아침이 오고 있었다. 온갖 새들이 감미롭게 지저귀고 있었고, 솨아 바람소리에 나뭇잎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금새 눈부시도록 장엄해진 태양은 쳐다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온 생명이 태동하는 무아지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난데없이 온 여우숲의 시공이 영원속으로 들어왔다. 순식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내가 보였고, 세상을 보았으며 신의 존재를 느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여우숲은 한 사람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했었다. 바람결에 솨아 소리를 내며 잎을 날리는 그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고 싶다 했었다. 난 먼 길을 돌고 돌아 이곳에 이르렀고, 석달전 내가 노트에 적어놓았던 풍광이 그대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했다. 탱자나무의 가시가 하나 둘 떨어지듯이 어제의 상념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그곳에 현존해 있었다. 멀리서 나의 나무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 찬란한 해를 머금은 나무 한 그루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것은 순간이였으나 영원이었고, 꿈이었지만 삶이었다.


구본형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그역시 인생을 늦게 시작한 사람이었다.  늦게 피기 시작했지만 그만의 빛깔로 개화했고, 그가 날린 씨앗들은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가슴가슴에 알알이 박혔다. 그는 나무가 되고 싶다 했었다. 가장 되고 싶은 나무는 깊은 산속의 아주 높은 곳에서 오래 자란 줄기 붉은 소나무였고,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종종 찾아주는 너무 깊지 않은 산 맑은 계류옆의  벚나무이기를 원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가로수로 잘 자란 느티나무였으면 좋겠다고 생전의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밑에서 잠시 땀을 닦듯 그렇게 주위에 앉거나, 그러기에도 너무 바쁘면 그늘에 잠시 기대서서 땀을 닦으며 쉬어가는 나무는 그의 꿈이었고 그의 본성이였다.


여우숲에서 맞은 새벽, 나 역시 한그루 나무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나무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잎만 가지고는 어떤 나무인지 알기 어렵다. 가지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비로소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여우숲에서의 맞은 그날 아침 나 역시 나의 나무가 어떤 나무가 될 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언젠가는 대지를 뚫고 나와 그 존재를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중용의 첫 구절은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준 것은 본성이며 성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도이며 도를 닦는 것은 가르침이다'이라고 시작한다. 여우숲에서 나의 나무를 찾은지도 정확히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후 난 내 내면을 뒤지고, 나의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찾는 값진 시간들이었다. 운이 좋아 지난 3월 첫 책을 출간했다. 아직 채 영글지 않은 풋열매 한알을 세상에 밀어낸 어린 나무는 아직 마디마디 막혀있는 에너지의 샘을 찾아 뿌리를 조금씩 조금씩 내리고 있는 중이다. 싹을 틔운 풀 한포기가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다. 소나무가 될 지, 느티나무가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해를 머금었던 아침의 그 어린 나무는 우주의 별빛을 받고 더 큰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언젠가는 더욱 단단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또다시 열매를 맺고, 낙엽이 떨어지고, 수많은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의 나무는 아직 하늘을 향해 자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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