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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절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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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Jun 08. 2020

진짜와 가짜

영화 <룸>과 키치의 세계

자신이 향해하고 있는 배를 제외한 모든 배는 낭만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에머슨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두 책 모두 키치Kitsch의 세계를 극명히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키치는 쉽게 말해 가짜를 말합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죠. 화장을 한채로 잠을 자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바로 키치입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는데, 방금 화장한 듯한 뽀사시한 여주인공의 얼굴은 현실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죠.


어느 정도는 키치가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SNS, 유투브, 대중문화는 대부분 키치입니다. 대중음악, 상업적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큐멘타리에서 똥싸는 장면은 그냥 일상이지만, 상업영화에서 똥싸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건 무엇인가를 노린 술수에 불과합니다. 어리석은 우리는 행복을 키치에서 찾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키치가 아니라는게 또한 함정입니다.


키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실제 삶으로 오도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은 구질구질한데, SNS로 보는 친구의 모습은 화려합니다. 키치에는 서사가 없습니다.  불은 훨훨 타지만, 정작 연기는 나지 않습니다. SNS에서 보게 되는 캠핑장 바베큐 풍경은 부럽기 그지없지만, 연기와 뜨거움으로 고생하는 실제 디테일은 우리의 시선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사는 줄거리가 있습니다. 사연이 있단 말입니다. 많은 것들이 단일한 하나의 장면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서정과 대비되지만, 그렇다고 키치가 서정은 아닙니다.  서정은 모두에게 똑같이 보이는 풍경과 상황이 주관적으로 전환된 감정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인생은 서정과 서사가 엉켜있습니다. 서정이 없는 서사는 단순한 기록일 뿐이죠. 전인미답인 모두의 인생에는 각자의 서정이 있습니다.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느끼는 감정은 다 다릅니다.  서정은 주관적 사실이고 서사의 단위가 되므로 타당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키치는 가짜 서정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대부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죠). 나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타자의 감정에 불과합니다.


먼저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는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가 들어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만 감상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집은 세상의 구석이다. 집은 누구에게나 최초의 세계였다."
- 가스토 바슐라르 <공간의 미학>


영화 <룸>에서 아들역으로 나오는 잭에게는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잭과 엄마 조이는 7년째 작은 방에 갖혀 살고 있습니다. 7년전 열일곱살의 조이는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방에 갖히게 되었고, 거기서 잭을 낳게 됩니다.  엄마 조이와 아들 잭은 천창 하나 달려 있는 좁은 방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옥같은 생활 끝에 어느날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 조이와 잭은 원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뻔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을 극화한 그저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네이버영화평점의 배신을 맛보는듯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건 뭐지? 결말이 이제 다 나온것 같은데 영화 러닝 타임중 반이나 남아있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더 남아있다고?


영화는 그 시점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영화 <룸>은 키치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중 전반 1시간은 그냥 그런 납치극일뿐, 흔한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우리의 기대를 와장창 무너뜨립니다. 감금에서 풀려나면 이제 모든 고난은 끝나고 행복만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죠. 온갖 뉴스와 미디어에 길들여지고, SNS와 사이버월드에 현혹당하고 있는 우리는 알지 못하는 다른 무엇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합니다. 그냥 보는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키치가 아닌 현실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오랜 시련끝에 돌아왔는데, 조이의 엄마와 아빠는 이미 이혼한 상태죠. 딸을 잃어버리고 그 오랜시간동안 정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딸이 돌아왔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인 듯 합니다. 7년만에 처음으로 함께 모인 저녁식사 자리조차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조이의 아버지는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불편함과 상처는 반복됩니다. 아무도 드러내기 싫어하는 현실이지만 실제 삶이 그렇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디에나 고난이 있고 어디에나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들 잭은 현실에 적응하게 되고 평범한 아이의 일상을 찾아가게 됩니다만,  엄마 조이는 결국 7년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아들 잭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새드 엔딩으로 변할 뻔한 결말을 구원하는 것은 서정이였습니다. 잭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조이에게 보내게 되고, 조이는 희망을 되찾게 됩니다. 머리카락은 서정을 나타내죠. 이것은 키치가 아닌, 주관적 현실이기 때문에 진짜 감동입니다. 키치로 만들어낸 상업적 감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 역시 키치일수도 있겠죠. 영화시청자들에게는 주관적 현실이 아니니깐요. 하지만 영화에서 조이가 아들 잭의 머리카락을 받고 미소짓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만의 서정을 오버랩시켜본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지구를 지키는 어벤저스와 같은 전인류애적인 감동이 아닐지라도,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은근한 감동을 전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네이버 평점은 타당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절실함을 마음에 품고 이른 새벽 해돋이의 장엄한 광경에 의지를 다졌지만 작심삼일로 그친다면 그것은 키치에 그치고 맙니다. 하지만 그 해돋이의 풍경을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넣어놓고 게을러질때마다 사진을 보며 스스로를 고무하고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며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현실이 됩니다. 남 부러워하는 것은 그만두고 자신의 일상에 충실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디에나 고난이 있고, 어디에나 행복은 있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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