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공모의 마지막 주제인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것'이라는 주제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내가 요즘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이 '나 자신을 알자', '참나는 찾아야 하는 가장 큰 보물이다' 따위의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나와 나 사이에는 나와 타인과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만큼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은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내가 믿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어쨌든 가장 나다운 것은 뭐지? 이건 비단 브런치공모가 아니더라도 내가 꼭 글로 써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의 모습? 회사에서 몰입해서 일하는 개발자의 모습?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아마추어 작가로서의 모습? 모두가 그럴듯 했다. 정답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답으로 확신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봄직한 것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은 외부로 드러나는 삶의 표피에 가까웠다. 솔직히 가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나의 내면을 덮고 있는 페르조나들이기도 하다. 가장 나답다는 확신을 가지기에는 2% 부족했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의견을 존중하는 무리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적 자아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각각의 무리를 대할 때 자신의 다른 면을 드러낸다. 자식을 대할 때는 부모라는 절대적 관계가 개입된다. 회사에서 일을 할때는 직원이라는 조직체의 일부로서의 사회적 자아가 존재한다. 작가 역시 독자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다운 모습'을 찾을수 있을지언정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무엇인가'를 찾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조금 더 근원적인 것을 찾고 싶었다. 순간 떠오른 답은 간단했다.
"가장 나다운 건 혼자 있을 때 아냐?"
빙고! 날 나답게 만드는 것은 '고독'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쉽게 말해 내향적이다. 내향성 자체가 나다운 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나다운 모습, 나다운 행동에 있어 내향성이라는 기질은 가장 큰 뼈대를 이루고 있다. 내향적인 인간유형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기 힘든 스타일이다. 이것은 사회성 좋은 외향적인 인간들의 생각이다. 근래 내향적인 인간의 우월성(?)을 다루는 책들이 간간히 나오고 있기는 하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외향적 인간들이 주류이며 승자다. 행복의 반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인 요인인데, 바로 그것이 외향성이라는 연구결과는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여전히 외향성을 키우는 것이 성공과 행복의 열쇠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내향성은 부정적으로 간주되기 쉽다. 내향적인 사람은 남에게 자기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고, 표현이 서툴고 더디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소리도 듣게 된다. 조심하고 주의하는 성격이 부정적인 성향으로 매도당할때도 있고, 소극적인 배려가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자기 딴에는 배려한다고 하지만,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수도 있다.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의 배려에는 깊이가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나에게 비추어 남을 대하는 황금률을 가진 유형인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 내향적 인간과 외향적 인간을 구별할 수 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큰 소리로 자리를 양보한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아주머니들이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의 아주머니들은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외향성이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할 때 그냥 슬며서 일어난다. 그런데 왠걸 뒤쪽에 서 있던 다른 아줌마가 냉큼 엉덩이를 자리에 던져넣는다.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이다.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났던 내향적 인간은 별 얘기를 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엉거주춤 서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리양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엊그제 퇴근할 때 일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그 엄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전철에 들어왔다. 내 쪽으로 향하는 걸 보고 아이 엄마와 눈을 맞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내 쪽으로 오는 속도와 거리에 맞춘 계산된 타이밍이었다. "OO야, 저기 앉자"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말했다. 자리에 다가오는 아이를 보고 객차내 다른 빈 곳으로 향했다. 시크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배려하고도 뻘쭘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내게 아주머니의 눈인사가 전해졌다.
'고마워요^^'
'뭘요^^'
내 작은 눈의 미소가 대답했다. 단추구멍같이 작은 눈이라서 잘 안 보였겠지만, 느낄수는 있었을 것이다.
나름 자연스럽다. 무슨 자리 하나 양보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하냐고? 하지만 이런게 가장 나다운 거다.
외향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닿는다. 많은 분야에 미친다. 외향성은 넓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내향성은 깊이를 만든다. 깊으면 결국 타인에게도 닿는다. 또한 그 깊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닿는다. 성찰의 깊이만큼 가장 나다운 것을 찾을 가능성 역시 커지게 된다. 내향성이 나다움이라는 것의 뼈대를 이루고, 다시 그 내향성으로 인해 나를 더욱 잘 알게 된다. 결국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말한 바 있다. 이 명언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대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오해하지 말자. 가장 개인적인 것은 내가 잘 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내가 그것을 잘 할수 있는 이유'다. 그 바탕은 내향성이 될수도 있고, 외향성이 될수도 있다. 또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다른 무엇인가가 될 수도 있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그 출발점은 자신의 기질과 성향이다. 자신의 기질과 성향, 그리고 살아온 환경이 만난 것이 바로 나의 스토리다. 결론은 간단하다! 타고난 본성을 완전히 깨닫는 것(견성 見性) - 그것이 가장 나다워질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