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롭샷
테니스나 배드민턴에서 공(셔틀콕)의 속도를 줄여서 상대 네트 바로 앞에 떨어뜨리는 기술이다. 상대가 엔드 라인 근처에 있을 때 기습적으로 드롭샷을 활용해 포인트를 따낼 수 있고, 점수로 연결되지 않더라고 상대는 공을 받기 위해 앞으로 빠르게 뛰어야 해 체력 손실이 발생한다. 주로 테니스에서는 길게 떨어지는 스트로크 대결을 펼치다가 드롭샷을 구사한다. 하지만 강하게 날아오는 공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라켓 면을 뉘여 적절한 언더 스핀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익히기 힘든 고급 기술이다. 몸의 자세나 팔의 동작이 정확하지 않으면 공이 네트에 걸리거나 오히려 상대에게 찬스가 되기도 한다. 드롭샷을 받아낸 상대도 네트 앞에서 여러 방향으로 다시 드롭샷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성공 확률만큼 실패 확률도 높은 기술이다.
배드민턴에서도 공을 높고 길게 보내는 하이클리어를 주고받다가 드롭샷으로 경기 흐름의 변화를 주는 경우가 많다. 역시 드롭샷을 받기 위해서 상대는 네트 앞으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바로 득점을 얻지 못하더라도 상대의 체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테니스에서는 스트로크와 드롭샷을 할 때 라켓 면의 각도가 완전히 달라지지만, 배드민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이클리어나 스매싱과 똑같은 준비 동작에서 스윙의 속도를 줄여서 셔틀콕이 날아가는 거리를 짧게 만들기 때문에 상대가 알아차리기는 더 힘들다. 테니스에서의 드롭샷과 더 비슷한 배드민턴 기술은 헤어핀(Hairpin)이다. 네트 바로 앞에서 라켓을 지면과 180도에 가깝게 눕혀서 셔틀콕이 살짝 네트를 넘게 만드는 기술이다. 셔틀콕이 날아가는 모양이 헤어핀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선수가 드롭샷을 구사하면 상대는 헤어핀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파리올림픽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따낸 ‘셔틀콕 여제’ 안세영은 가장 공격적인 기술인 스매싱도 별로 시도하지 않고 경기를 쉽게 승리하는데, 바로 이 드롭샷과 헤어핀 기술이 거의 완벽하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헤어핀을 포함해서 드롭샷은 한 포인트 이상의 효가가 있다. 상대의 생각을 뒤흔들고, 움직임을 무너뜨리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떤 선수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드롭샷을 구사할 수 있다면, 상대는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엔드 라인 근처에서 플레이를 하면서도 항상 상대의 공이 네트 바로 앞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머리에 담고 경기를 해야 한다. 드롭샷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테니스에서 드롭샷을 가장 잘 활용하는 선수는 ‘무결점 선수’ 조코비치와 ‘신성’ 알카라스, ‘황제’ 페더러 등을 꼽을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코비치는 주로 백핸드로, 페더러는 포핸드로 드롭샷을 구사하는데, 알카라스는 양쪽 다 자유자재로 이 어려운 기술을 활용한다. 지난 2023년에 ATP투어(세계남자프로테니스투어)는 당시 톱10 선수들의 드롭샷을 분석했는데, 알카라스가 경기당 평균 4.17개로 1위, 조코비치가 3.55개로 2위였다. 포핸드 드롭샷은 알카라스가 2.83개로 압도적인 1위, 백핸드 드롭샷은 2.89개로 조코비치가 확실한 1위였다. 다음은 알카라스의 포핸드 드롭샷에 대한 ATP투어의 분석이다.
“알카라스의 포핸드 드롭샷을 받기 위해서 상대 선수는 10.9m를 2.1초 안에 커버해야 한다. 알카라스의 샷을 인식하고 동작을 멈추고 공을 치는 시간 평균 1.0초를 빼면 달리는 데 1.1초가 남는데, 초당 9.9m의 속도가 필요하다. 우사인 볼트와 같은 세계적인 스프린터라면 쉽게 가능하겠지만, 아무리 빠른 ATP 선수들이라도 이 상황에서 수준 높은 샷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With a well-placed shot, opponents must cover 10.9 meters on average in 2.1 seconds from the time the shot is hit to reach the Alcaraz forehand drop shot. Subtracting the average time to recognise the shot, stop, and hit it (1.0 seconds), leaves 1.1 seconds for the run itself, requiring about 9.9 meters per second speed off the gun. Although a world-class sprinter like Usain Bolt could easily accomplish this feat, it is difficult for even fast ATP players to hit a high-quality shot in response.)
테니스의 많은 명승부 가운데 조코비치와 알카라스가 맞붙었던 지난 2023년 윔블던 결승을 보면, 드롭샷의 매력과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테니스 팬이라면 경기 영상을 꼭 확인하길 바란다.) 1세트를 6대 1로 허무하게 내준 알카라스는 2세트에 드롭샷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3대 3으로 맞선 7번째 게임에서 알카라스의 기습적인 드롭샷을 받으려다 조코비치는 앞으로 넘어져 한 바퀴를 굴렀다. 타이브레이크 4대 4에서도 알카라스가 라켓으로 달걀을 조심스럽게 옮기듯 공을 네트 위로 살짝 넘겼는데, 순간 조코비치의 발은 얼음이 됐다. 이 포인트로 2세트를 가져온 알카라스는 3세트도 승리했지만 다시 4세트를 내주고 만다. 5세트 알카라스가 5대 4로 앞선 상황, 0-15에서 백핸드 스트로크를 주고받던 알카라스가 다시 포핸드 드롭샷을 정확히 떨어뜨렸는데, 코트에는 괴상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조코비치가 자신도 모르게 나온 ‘으악’ 소리와 함께 방향을 바꿔 7발을 떼서 가까스로 공을 받아냈지만 알카라스는 조코비치 위로 회심의 로브샷을 날렸고, 그대로 포인트. 결국 알카라스가 통산 두 번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드롭샷으로 유명세를 탔던 선수로 프랑스의 위고 가스통이 있는데, 2020년 프랑스오픈 16강전에서 당시 세계랭킹 3위였던 오스트리아의 도미니크 팀은 당시 20살, 세계 239위인 가스통에게 3대 2로 가까스로 이기고 이런 인터뷰를 남겼다.
“저는 오랫동안 경기하면서 그렇게 대단한 터치를 하는 선수를 보지 못했어요. 가스통의 드롭샷은 외계에서 온 겁니다. 저는 네트를 향해 400번은 전력으로 달렸어요.”
(I haven`t seen for a very long time a player with such a big touch in his hands. I mean his drop shots are just from another planet. I was sprinting like 400 times to the net.)
이런 드롭샷의 기술은 일상 대화에서 특히 설득 상황에서 유용하다. 사실 세상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최종 목적은 설득이다. 나의 오늘 일과만 봐도 보도자료를 보내는 방식을 조금 수정해 달라고 했던 취재원과의 대화, 기사에 첨부할 그래픽을 좀 더 명확하게 만들어 달라는 요구,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음식을 더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 개진, 아들에게 서둘러 씻으라는 잔소리 등등 모두 사소한 대화지만 또한 모두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설득의 과정이었다. TV에 나오는 광고,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정치인들의 호소 또한 고도로 계산된 설득이다. 이러한 설득의 과정에서 쉽게 예측이 가능한 강한 스트로크 대신에 가끔은 허를 찌르는 드롭샷을 날려보란 얘기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찬반으로 갈려 강하게 각자의 입장만을 주장할 때 한발 물러나 더 광범위한 주제로 논점을 바꿔본다든가, 상대 주장 가운데 수용 가능한 걸 먼저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2020년 9월 25일부터 2022년 4월 1일까지 회사에서 시사토크 <알고리줌>이라는 정치토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여야 정치인이 한 명씩 출연해서 한 주 동안의 정치적 쟁점을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프로그램을 시작할 땐 당시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고정 패널이었다. 재미있고 유익한 콘텐츠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토론 원칙 3개를 정했다. 웃기, 박수 치기, 대안 제시하기 등이다. 고성이 나오고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마다 이 토론 원칙을 고지하고 클로징 전엔 누가 이 원칙을 더 잘 지켰는지 공개했다. 토론 프로그램이라는 게 끝나고 나면 쟁점에 대한 합리적인 논쟁보단 서로의 의견에 말꼬리 잡기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은 헛웃음이 나오는 3개의 토론 원칙이 훨씬 생산적인 토론을 이끌었다. 상대의 예상치 못한 호응과 박수에 논거가 흔들리기도 하고, 토론의 주도권이 바뀌기도 했다. 내가 생각했던 토론의 드롭샷이었다.
모든 일상을 ‘느리게 느리게’ 사는 아들 정안에겐 반복되고 일관된 외침보다 흥밋거리를 추가하는 게 효과적이다. 가령 숙제하라고 두세 번 큰 소리로 외치다가 그래도 행동의 변화가 없으면 전략을 수정한다. 한 문제를 30초 안에 풀 수 있을 것 같다며 갑자기 시간을 재기 시작한다. 그러면 정안이는 당장 숙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시간 안에 문제를 푸는 것에 집중한다. 이 30초 미션을 수행하다 보니 어느새 숙제도 마치게 된다. 나의 드롭샷에 말려든 것이다. 하지만 테니스 동호회 경력 20년에도 수준 높은 드롭샷 기술을 장착하지 못한 것처럼, 내 커뮤니케이션의 드롭샷도 실패할 때도 많다.
끝으로 테니스와 설득에서 드롭샷을 성공하기 위한 공통점을 소개한다. 첫째 상대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다. 두 번째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세 번째 힘을 빼야 한다. 네 번째는 반격에 대비해야 한다. 끝으로 다섯 번째 완벽한 기술 구사를 위한 반복된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