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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ul 11. 2023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가서 양복 입고 와. 어디 조상님 뵈러 가는데, 그 따위 잠바를 입고 오노”     


  2015년쯤일까? 40대 후반의 아들에게 불호령이 내렸다. 우리집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묵리로 아주 촌구석이다. 그곳에 선산이 있고 조상의 묘가 그 산 주변에 있다. 그런데 그 산이 강원도나 경상도에서는 그저 뒷동산 수준이지만 서울에서는 꽤 높은 산이어서 해마다 벌초 갈 때면 ‘나 죽었네!’ 했다.  


  왜 옛 어른들은 묘를 한 곳에 안보고 이산 저산에 흩어서 조상을 모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아버지의 고조부까지 그리고 그 옛날 작은 할머니(할머니가 두 분인 경우도 있었다)까지 묘를 찾아 벌초하면, 7~8기는 기본이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시작해 오후 3시 정도나 되어야 벌초를 마쳤으니 정말 초죽음이었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하니 더위와도 싸워야 했다.     


  그런 날씨에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하는데 내 아버지는 등산복 차림을 용서하지 않으셨다. 죽은 조상님 묘에 가는데 굳이 양복을 입으라니 그것도 제를 올리러 가는 거면 이해가 되지만 벌초를 하는 데 말이다. 어쩔 수 없어 양복을 입고 이산저산 다니다 내려오면 이내 양복은 그 수명을 다하고 만다. 형님과 나는 어쩔 수 없어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기 시작했다. 바지는 검은색 등산바지를 입고, 윗옷만 검은색 양복 자켓을 걸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매우 흡족해 하셨다. 어차피 더워서 산에 가서 일할 때는 자켓을 벗어 놓으니 뭐 특별히 옷이 상하지도 않았다.     


  내 아버지는 양반가의 서당 훈장과 면장을 두루 거치신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 한학이라는 것이 학문이기보다는 그저 한자로 된 종교 서적? 따지고 보면 유교서라고 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매우 봉건적이고, 고지식은 둘째가라면 성내시고, 보수주의는 기본으로 무장하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와 나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술자리를 해도 그냥 ‘마시라’ 하면 ‘예’하고 먹는 게 다였다.     


  그 무뚝뚝한 아버지가 실명하여 앞을 못 보시면서 벌초 때 양복을 입는 일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2019년 여름 당신이 마지막임을 느끼셨는지 앞을 못 보시면서도 벌초를 가시겠다고 하셨다. 형님과 나 그리고 사촌들까지 번갈아 아버지를 업고 산행을 해 한 분 한 분 제를 올렸다. 그리고 마음이 홀가분하셨는지 앞을 못 보시면서도 더 활기차게 주민센터의 헬스장을  다니셨다. 그러던 2019년 11월 헬스장에서 뒤로 넘어져 척추골절이 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섬망이 왔다. 조상님이 눈에 보이시는지 자꾸 조상님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서웠다. 병원에서 치매는 아니고 기력이 떨어지고 앞이 안 보여서 섬망이 온 것이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꼿꼿하신 분이 너무나 나약하게 꺼지는 촛불처럼 잦아들기 시작했다.      


  앞을 못 보고 쇠약해져 누워 계시면서도 손주가 가서 귀에 할아버지 손자 OO가 왔어요. 하면 바지춤을 자꾸만 쓸었다. 주머니에 돈을 꺼내 손주를 주려는 행동이다. 조건반사처럼 몸에 익어 있는 습관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2020년 3월 팬데믹으로 온나라가 떠들썩 할 때 길지도 섭섭하지도 않게 4개월 남짓 격하게 앓으시고 떠나셨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살갑게 말씀을 해주신 적이 없다. 다만 삼수 후 군대를 다녀와 25살이 되어 대학에 합격했을 때 그냥 무뚝뚝하게 한 번 안아 주신 것이 다였다. 그것이 내 아버지와의 스킨십 기억이다. 그런데 이젠 그 꼰대를 볼 수 없어 그리우니, 나도 꽤 나이를 먹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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