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철학자의 위로'에 밑줄 긋기
마흔에 글쓰기를 시작한 나는 박완서 작가의 책에 관심이 많다.
솔직한 감정을 담아낸 문체가 강하면서 묘한 매력을 풍겨 관심이 간다. 그리고 인생의 비슷한 시기에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굳이 찾아내어 더 그의 책을 가까이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을 읽었다.
책 표지에서 처음 듣는 낯선 단어를 만났다.
'참척'
참척(慘慽)은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뜻한다.
박완서 작가는 아들 잃은 고통과 슬픔. 즉 참척의 마음을 글로 전한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날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배가 고파 밥을 먹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고통.
주변 사람들의 위로에 억지로 괜찮다고 답해야 하는 곤란한 시간들.
그리고 자식을 먼저 보낸 죄 많은 엄마라는 죄책감.
글을 읽으며 작가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 잃은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잠시 상상해봤다.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했고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죽음에 정해진 순서가 있을까?
먼저 온 사람이 먼저 가는 게 자연의 이치 같지만, 애석하게도 죽음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
죽음의 순서가 엉켜버리는 건 인생에서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의 시간이다.
박완서 작가처럼 죽음의 순서가 엉켜 자식을 잃은 큰 고통에 놓인 한 여인을 위로해 준 철학자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이다.
그는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고통을 위로한다.
"저마다의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끝은 처음 놓인 그대로 머물 것이며, 어떤 노력과 영향력으로도 뒤로 밀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당신의 아들은 계획된 대로 삶을 마쳤다고 여기세요. 그는 자신의 수명을 지녔으며, 그리고 정해진 시간의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에 가까워진 것이 노인이나 이미 내리막에 있는 사람뿐이라고 착각하고 있지요. 하지만 유년기의 아이도 청년도 모든 나이에서 우리는 이미 죽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운명은 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죽음이 더 쉽게 우리에게 숨어 들어올 수 있도록 삶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숨겨 두지요. 소년은 유아의 탈바꿈이며 청년은 소년을 노년은 청년을 앗아갑니다."
세네카의 '철학자의 위로'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한 책이다.
늘 위로받고 싶은 내게 철학자는 어떤 위로를 건네줄까 궁금했다.
세네카가 건넨 위로의 글을 곱씹어 읽어봤다.
아들의 죽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금기의 영역이라 감히 그 고통을 느껴보기도 그리고 상상해보기도 싫지만 세네카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칠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담담하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고통을 느꼈던 죽음은 아빠의 죽음이다.
100세 시대에 68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빠를 생각하면 조금 더 살다가셨음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빠를 보내드린지 7년째 되는 요즘은 아빠의 정해진 삶의 목적지가 그 시간까지였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죽음의 순서가 내게는 언제 찾아올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죽음이 내게 손길을 내밀 때, 나는 이 일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까.
내게 죽음은 항상 두려움의 존재다.
죽음을 생각하면 중환자실에 있던 아빠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숨이 끊겨가며 고통스러워 하던 아빠 얼굴이 생각나며 눈을 질끈 감는다.
죽음은 이처럼 두렵기만 한 존재일까?
두려움의 존재로 죽음을 맞이하면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때 슬프고 억울하기만 할 것 같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순서에 의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선 흘러가는 시간을 유의미하게 보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덜 억울하고 덜 분하고 덜 속상하게 죽음의 순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박완서 작가의 글과 철학자 세네카의 글을 읽으며 짧게나마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갖게 해 준 유의미한 시간을 통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다는 그리고 죽음을 두려움의 존재만으로 바라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제가 읽고 인용한 세네카의 글은 민음사에서 출간된 '철학자의 위로', 이세운 옮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