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승의 길
대학교에 입학했다.
드디어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기숙사는 추첨에서 떨어졌고 학교 근처에 작은 원룸을 얻었다. 엄마와 아빠는 작은 원룸에 들어갈 중고 냉장고와 집에 있는 티브이를 가져와 연결해 줬다. 본격적인 대학생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캠퍼스의 낭만을 기대하며 아침 일찍 학교로 갔다. 그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드라마 중에는 대학생활을 다룬 것들이 꽤 있었다. 대학교에 가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잘생긴 선배가 있을 것 같았고 화려한 캠퍼스에서 마냥 행복한 생활을 할 것만 같았다. 부푼 꿈으로 내가 다닐 학교로 향했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캠퍼스는 넓은 듯 좁았고 건물들은 낭만이라는 단어와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면접을 보러 갔을 때는 떨려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건물 외관과 내부를 자세히 살펴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건물 외관은 6.25 전쟁 때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낡았고 내부는 상상 속 대학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상과 너무 다른 모습에 현기증이 났다. 삐그덕 대는 낡은 의자와 뽀얀 먼지 가득한 책상이 나를 반겼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교육을 이토록 강조하는 나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교육열은 대단한데 교육을 책임질 예비교사들은 정작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야 했다. 최근에 대학원을 다녔는데 이십 년이 지났음에도 사범대 교육현실은 제자리인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친구들은 술을 한잔씩 마실 때마다 속내를 드러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범대학 학생들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IMF로 다들 집안사정이 유쾌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조기퇴직에 명예퇴직을 하신 부모님들은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리셨고 일을 하지 않던 엄마도 시간제로 일자리를 구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안정적 직장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와 열망을 내비쳤다. 다수의 아이들의 가정형편이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대체적으로 사범대생들은 모범생이었다.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해냈고, 불만이 있어도 책임감 있게 끝까지 해냈다. 가끔은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한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모든 것에 지나치게 성실했다.
교사 선발인원은 많지 않았다. 모든 과목이 비슷했다.단 몇 개의 자리를 두고 몇백 명이 경쟁해야 했다. 가산점을 받기 위해 모두 복수전공을 신청했고 방학 때도 계절학기를 들으며 공부했다. 나는 어쩌자고 이 어렵고 경쟁이 치열한 곳에 발을 들였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꾸역꾸역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지냈다.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기보다는 임용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점관리에 임용고시 공부까지 대학생활은 생각보다 빡쎘다.
넓은 세상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교사의 꿈을 키워야 하는데 사범대를 다니며 내 안목은 임용고시 합격으로 좁아졌다. 오로지 교육학과 전공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수업실연 연습을 했다. 그렇게 대학시절이 지나갔다. 4년을 임용고시 위주로 산 우리는 일반적인 기업에서 요구하는 취업 조건을 갖추기 어려웠다. 교사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때론 고문 같았고 임용에서 떨어지면 취업할 곳을 찾긴 어려웠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임용고시에 전념하게 했고 나는 그토록 원하던 교사가 되었다.
대한민국 공교육의 질은 높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크게 학습지도와 생활지도 두 가지이다. 교사가 되고자 교대와 사범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입결은 높은 편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임용시험에 합격했으니 학습지도에서는 베테랑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생활지도는 교사가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생활지도가 정말 어려워졌다. 참고 버티는 것에 한계가 왔다. 20년을 담임교사로 교과교사로 지내오는데 매년 더 힘들다. 나는 앞으로 교직에서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승이 되고 싶었지만 스승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교사의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지경까지 왔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잘못 꼬여버린 매듭이 풀린다면 나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