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7년 그날이 시작이었다.
꿈을 묻는 질문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말문이 트였을 때부터 아무렇지 않게 꿈이 뭐냐는 질문을 들으며 자란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학창 시절 내내 새롭게 만나는 담임에게 취조당하듯 꿈을 고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나는 꿈이 없었다. 흥미와 적성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꿈을 이야기하는 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솔직하게 꿈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주변인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그치는 말투로 꿈이 없는 내 인생을 질책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자 다수가 인정하는 적당한 직업을 하나 찾아내서 이게 내 꿈이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찾아낸 꿈이 교사였다. 모든 것이 그냥 적당해 보였다. 그 후부터 학창 시절 내내 내 꿈은 교사였다.
1997년은 상상하기 싫은 해이다.
1997년 어느 여름날 밤 11시. 나는 시골 종합병원 중환자실 앞에 있었다.
인신매매의 공포가 난무하던 시절인지라 10시에 야자를 끝낸 여고 앞에는 부모들의 대기줄이 길었다. 나름 곱게 자란 터였기에, 아빠는 흉흉한 세상에서 딸을 보호하고자 매일 밤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정해진 시간 똑같은 그 자리, 교문 건너편 횡단보도 옆. 낡은 차 안에서 아빠는 매일 졸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빠의 차는 없었고 나를 기다린 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큰 엄마였다. 큰 엄마는 아빠가 병원에 있다며 근처 종합병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아빠에게 큰 사고가 났음을 병원에 들어가 깨달았다. 3층 중환자실 앞에서 엄마와 동생과 함께 아빠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아빠는 무면허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셨고 여러 날 아니 여러 달을 병원에서 지내야만 했다.
1997년은 대한민국만 구제 금융의 손길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우리 집을 구제해 줄 금융의 손길도 간절히 필요했다. 유일한 수입원인 아버지의 병원 생활로 집안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엄마는 좋지 않은 집안 경제를 자식들에게 숨기려 애썼지만 가난은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이다.
아빠의 사고를 계기로 K-장녀인 나는 뭐든 하고 싶었다. 빨리 돈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아니 할 수 있는 것은 공부가 전부였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수능을 봤다. 수능을 보고 대학입학 원서를 작성하기 위해 담임과 상담했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여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염치가 없었다. 우리 집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알기에. 담임선생님도 그런 사정을 눈치챘는지 지방 국립대에 있는 사범대를 내게 권했다. 대학을 가고 싶다면 무조건 나는 국립대를 가야 했다.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담임은 내가 늘 적당한 꿈으로 적어 낸 장래희망을 보고 사범대를 권했다. 딱히 가고 싶은 학과도 간절히 바라던 꿈도 없던 나는 담임의 권유로 사범대에 지원했다. 엄마는 마치 딸이 선생님이라도 된 듯 원서에 도장을 찍으며 사범대를 반겼다. 모처럼 웃는 엄마 얼굴을 보니 사범대에 합격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엄마가 더 활짝 웃을 수 있도록 선생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997년 아빠의 사고는 내게 꿈을 심어줬다.
내가 처한 여러 현실들은 나를 사범대로 인도했다. 그렇게 나는 지방 4년제 국립대학교 사범대생 99학번이 되었다. 만약 97년 아빠의 교통사고로 우리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나라에 IMF 구제의 손길이 없었다면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집안 형편과 우리나라의 사정이 조금 괜찮았다면 내가 꿈을 찾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리진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1999년 대학 입시를 치르던 그 시절엔 안정적 직장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가득했다. 덩달아 사범대와 교육대의 인기도 높아졌다. 나는 사범대의 인기가 한참 올라가던 그 시기에 사범대에 진학했다. 교사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인 대학에 진학했다. 그렇게 나는 교사가 되기 시작했다.
교사 직업만족도 역대 최저 23.6%.
(2023.5.15. 교총 설문조사 결과)
10년을 꼬박 일해야 간신히 바뀌는 월급 앞자리 숫자.
아동학대신고에 대한 위협과 학생, 학부모의 다양한 민원으로 육체와 정신은 너덜너덜.
온갖 잡다한 업무 처리에 대한 부담과 압박.
연금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회적으로 받는 이유 없는 지탄.
매일같이 바닥을 찍는 교권.
대한민국 공교육 최전방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교 사.
이게 내 직업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선생이 되었다. 그리고 선생으로 스무 해 넘는 시간을 살고 있다. 선생으로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