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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en Tree Feb 20. 2021

전화번호 공개해야 하나요?

나는 교사로 사는 삶이 참 좋다.

가끔 사람들은 중학생을 매일 상대해야 하는 내가 힘들겠다고 위로를 건네지만, 나는 내 직업이 참 좋다.

물론 힘든 일도 많다. 하지만 어떤 직업이든 애로사항은 다 있는 법이고, 자신이 하는 일에 100%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새 학기를 앞두고 있는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는 이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2019년 2월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거리는 새로운 학급의 아이들과 학부모님들께 내 핸드폰 번호를 공개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당연히 담임교사의 연락처는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고,

내 전화기는 24시간 학급의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위해 대기 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런 생각을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바야흐로 2018년 5월 초였다.

2학년 아이들을 인솔하여 수학여행을 갔고 그날은 첫째 날이었다.

오후 4시경이다. 막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기 시작할 때였으니.....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 반 학부모님이다. 잘 도착했나 궁금해서 전화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전화기 속 어머님의 목소리는 많이 이상했다.


 "선생님, 저 아세요? 저 ***엄마예요. 우리 애가 수학여행 가서 제가 술을 한잔 했어요."


 헐..... 어머님이 술을 드시고, 담임에게 전화를 하신 거다.


 "어머님, 저희 숙소에 잘 도착해서 지금 방 배정하고 짐 정리 중이에요.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라며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말을 건넸다. 하지만 어머님은 전화를 끊을 생각이 없으셨다.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늘어놓으셨다.

30명의 아이들을 인솔하고 간 터라, 어머님의 전화를 길게 받을 수 없었다.

전화를 빨리 마무리해야 했다.

사실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짧지 않은 교직 경력 중에 이런 전화는 처음이었다.


그래 백번 이해하자, 딸아이가 없는 집이 얼마나 빈집 같았으면 나에게 전화까지 하셨을까.......

오죽하면 딸아이의 담임에게까지 전화를 걸었을까.....

이해하고 넘어가자 생각하며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기로 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도 조금씩  잊혀져 갔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어머님은 술을 드시고 또 전화를 하셨고 이 일은 몇 차례 반복됐다.

나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전화가 반복되자 어머님 정신이 말짱하실 때 내가 전화를 드리기로 결심했다.

술 드시고 전화를 하신 다음날, 심사숙고 끝에

오전 11시쯤(상담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이 시간이 인간의 마음이 가장 편안한 시기라 한다. )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차근차근 눌렀다.


"어머님, *** 담임이에요.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라 어머님께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어제 술을 드시고 전화하셨더라고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술 드시지 않았을 때 전화 주셨으면 해서요."


진짜 100번 고민하고 전화했다. 학교에서 학부모와 담임교사의 입장은 언젠가부터 갑과 을의 입장이 되었다. 나는 을의 입장이 되어 술 먹고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아주 어렵게 하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어머님은 알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일이 또 잊힐 때쯤, 찬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초겨울이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 웬걸 그 어머님이다.


'내가 그렇게 간곡히 부탁까지 했건만....

 또 전화라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술을 드신건 아닐 거야. 분명 ***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 꺼야.'라는 생각으로 전화기의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어머님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전형적인 술 먹은 사람의 음성이었다.


난 화가 났다. 나도 사람인데.....

선생 그림자도 안 밟는다던데....

그런 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않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내가 부탁까지 드렸는데......

기분이 너무 나빴다.

머릿속엔 수십 가지 생각이 맴돌았고, 나는 전화를 말없이 끊었다.


다음날부터 나도 모르게 올해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중학교 3학년으로 진급하고, 내가 그 학생의 담임교사가 더 이상 아니게 되었던 바로 그날.

그 어머님의 번호를 내 핸드폰에서 차단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내 전화번호를 학생들과 학부모님께 공개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가끔은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오면 무섭기도 하다.

전화번호 공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거다.


2021년,  새 학기를 앞두고 있는 지금.

나의 고민은 ing 중이다.

2021년을 함께 보내게 될 아이들에게 그리고 학부모님께 내 전화번호를 공개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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