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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Jul 27. 2021

민족 : 이, 아버지의 사진

- 김수영의 다원주의(2)

민족 :  이,  아버지 사진


한겨레신문에 실린 [거대한 100년, 김수영] - ①가족 <아버지 사진조차 몰래 봐야 했던 시인, 그렇게 아버지가 되다>에서 이경수 교수는 김수영이 “누구보다 뜨겁게 자유를 갈망했지만 누구보다 먼저 혁명의 실패를 예감했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혁명 이후에 대해 사유했던 시인”이라고 매우 적절하게 평가한다.    

경수 교수는 오랫동안 자유와 혁명의 시인으로 호명되었던 김수영의 시에는 가족이 자주 등장한다고 하면서, 가족과 관련이 있는 시들에 주목한다. 이 교수는 <나의 가족>에서 김수영이 “가족과 일상의 의미”발견했다고 설명한다. 


“평범함 속에 위대함이 있고 거칢 속에서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이 일기도 함을 이 무렵의 김수영은 깨달았던 것 같다. 그것을 그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이라는 혹독한 체험,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과 그로 인해 들여다보게 되었을 자신의 내면, 그런 성찰의 시간이 가족과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했을 것이다.”  

이 교수가  이 시에 깔려 있는 “자조적 긍정의 어조”를 지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거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 보고 짚어 보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후회,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는 말에서 감지되는 자조적 긍정의 어조는 가족이 일궈내는 일상의 풍경에 김수영이 평화롭게 머물지 못할 것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현실적인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한 가족의 사랑과 함께 시인으로서 “고대 조각의 사진”, “위대의 소재”, 즉 초월적 예술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그는 현실적인 생활과 초월적인 예술 사이에서 다원주의적 긴장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김수영은 해방 직후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묘정의 노래)와 생활난을 해결하는 위해 절실히 필요한 서양문명(공자의 생활난) 사이에서 다원주의적 긴장을 추구하였다.


그의 초기시에서 아버지는 서양문명과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는 민족정신을 상징한다. 이 교수의 아버지에 대한 설명은 오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이 교수가 “가족 중에서도 아버지는 단연코 높은 출현 빈도를 보인다”라고 쓰고 있지만, 단연코 높은 출현 빈도를 보이는 것은 아내와 자식이지 아버지가 아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핵심적인 시적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민족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해방기의 「이」와 「아버지의 사진」 두 작품에 불과하다.

이 교수는 「이」에서 “‘이’와 ‘아버지의 수염’은 시의 화자가 보지 못하거나 바로 보지 못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고, ‘나’를 괴롭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된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로 김수영의 전기적 사실을 제시한다.


“연극도 시도 부친이 그린 장남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을 테니 부친의 얼굴을 바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병세가 악화되어 모친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으니 그가 느꼈을 압박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虱)」에서 “아버지”는 개인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민족적인 차원에서의 아버지, 즉 민족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는 당시 사회정치적 현실을 “아버지”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전통이 “도립(倒立)”, 즉 거꾸로 세워져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미군정을 추종하는 반민족적인 “신문”들이 민족의 전통을 거꾸로 세워놓고 비판만 하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문들이 아버지의 “어두운 옷” 속에서 사는 벌레인 “이(蝨)”처럼 민족의 전통 속에 있는 부정적인 면을 들춰내고 있지만, 자신은 한 번도 이것을 보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반민족적인 신문들 때문에 아버지의 “수염”으로 상징되는 민족 전통의 위엄과 권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한탄한다.     

        

그는 “신문을 펴라”라고 외치면서, 정작 벌레인 ‘이’는 민족의 전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민족적인 “신문” 속에서 무수한 “행렬”처럼 걸어 나온다고 비판한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민족의 전통을 부정하면서 미국이 강요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찬양하는 신문의 “활자”(「아메리카 타임지」)들이 바로 ‘이’처럼 더럽고 해로운 벌레라는 말이다.


마지막 연에서 ‘이’가 “어제의 물처럼” 걸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도 당시 신문들이 주장하는 단독정부 수립은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다시 ‘어제’의 식민지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경고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시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민족의 전통을 부정하는 당시 언론을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민족주의적 정치의식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탈고일로 보아 「아메리카 타임誌」와 마찬가지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총선거 결정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미국과 이승만 세력이 추진하는 단독정부 수립은 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 놓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고, 이를 찬양하는 신문의 “활자”(「아메리카 타임지」)들이 바로 ‘이’처럼 더럽고 해로운 벌레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경수 교수는 「아버지의 사진」도 개인적인 맥락으로 해석한다.  


“장남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던 김수영은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김수영의 초기 시들에서 ‘아버지’는 보는 행위를 동반하며 성찰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진」에서 아버지는 개인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민족의 아버지인 백범 김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내용상 백범 김구 암살 사건과 그의 장례식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백범 김구는 통일민족국가 수립노선을 고수하다가 결국 1949년 6월 26일 극우 세력들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이 같은 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비참”을 느낀다. 여기서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虱)」에서의 추상적인 민족 전통과 달리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 시의 탈고일인 1949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점, 김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안경”이 아버지의 사진에 걸려있다고 하는 점, “편력의 역사”라는 시어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 현실적인 생활을 상징하는 “아내”와 대비되어 있다는 점, 이미「아침의 유혹」(1949)의 “백부(伯父)”에서 백범 김구가 암시적으로 등장했다는 점 등으로 뒷받침된다.


그가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김구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해 민족이 분단되는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미 민족의 처지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었지만, “푸른 눈”으로 통일을 꿈꾸던 김구의 죽음으로 인해 “나”를 비롯한 민족 모두 정신적인 “기아(飢餓)”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통일을 추구하던 ‘아버지=김구’의 죽음으로 인해 ‘나=민족’은 민족정신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더 큰 문제는 민족의 아버지인 김구 선생을 “모오든 사람”과 “처(妻)”까지 피해 숨어서 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정치적 현실이다.


김구를 암살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는 김구가 48년 10월 여순사건을 통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도 김구와 한독당을 쿠데타 세력으로 몰아서 철저히 탄압하면서 반공을 내세워 통일운동을 금지했다.


그래서 시인은 김구의 죽음에 대한 “영탄(詠嘆)”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주(詛呪)”보다는 김구의 죽음 이후 숨어서 통일을 얘기해야 하는 현실로 인해 결국 민족 분단이 영구화되는 것에 대해 더욱 “조바심”을 낸다.


그는 이후 “그의 얼굴”마저도 “습관”처럼 무감해지고, “그의 사진”이 상징하는 통일이 “무리(無理)”한 일이 되고 말 것을 염려한다.


그리고 “이 맑고 넓은 아침”에 “또 하나의 나의 팔”인 북쪽의 민족을 잃고 불구 상태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다시 “비참”을 느낀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과 민족의 아버지인 김구의 사망으로 인해 “얼어붙은 유리창들”처럼 분단이 고착화되고, 시침과 분침이 합쳐져 하나의 팔을 잃어버린 “시계의 열두 시” 같이 민족이 분단된 채로 방황하는 “편력(遍歷)의 역사”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한탄한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버릇’은 「공자의 생활난」의 ‘반란성’이나 「아침의 유혹」의 ‘습성(習性)’과 마찬가지로 민족정신이 인위적으로 없앨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반공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피하면서까지 ‘아버지의 얼굴’ 즉, 민족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버릇으로 굳어져서 없앨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는 민족통일을 상징하는 백범 김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반공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겠다는 강렬한 민족주의적 정치의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경수 교수는 김수영의 시에서 아버지와 누이, 가족 등을 하나로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된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 보면, 그의 시에서 가족과 아버지는 하나로 묶이기가 어렵다.


김수영의 시에서 가족은 현실적인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초월적 예술과 긴장 관계를 이지만, 아버지 즉, 민족정신은 서양문명과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시인이 생활난 해소를 위해 서양문명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의 상징성은 서양문명과 유사하고,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아버지와는 오히려 긴장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에 대한 오해는 다원주의자이자 상징주의자인 그의 성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김수영의 시는 소통불능의 난해시가 아니다. 그는 철저한 다원주의자이자 철저한 상징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의 시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김수영의 시에는 현실성과 초월성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사유가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는 해방 직후 민족 통일과 생활난 해결이라는 양대 과제를 중심으로 서양문명과 민족정신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이(蝨)(1947)


도립(倒立)한 나의 아버지의

얼굴과 나여


나는 한 번도 이(虱)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두운 옷 속에서만

이(虱)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울린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다


신문을 펴라


이(虱)가 걸어 나온다

행렬처럼

어제의 물처럼

걸어 나온다      


아버지의 사진(1949)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그래도 그것은

돌아가신 그날의 푸른 눈은 아니오

나의 기아처럼 그는 서서 나를 보고

나는 모-든 사람을 또한

나의 처를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오     


영탄(詠嘆)이 아닌 그의 키와

저주가 아닌 나의 얼굴에서

오- 나는 그의 얼굴을 따라

왜 이리 조바심하는 것이오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

나의 무리하는 생에서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이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하나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이오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의 열두 시같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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