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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Jul 29. 2021

유교 : 묘정의 노래, 공자의 생활난

- 김수영의 다원주의(3)

유교 : 묘정의 노래, 공자의 생활난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2) 유교 <모더니즘 이전에, 이미 핏줄에 흐르고 있던 선비정신>에서 김상환 교수가 “예술적 현대성이 무엇인지, 그 현대성을 뒤떨어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고뇌했던 몸짓은 우리 문학사의 위대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라고 김수영 시인을 평가하는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상환 교수는 「미역국」, 「거대한 뿌리」, 「더러운 향로」를 분석하면서, “전통은 썩어서 수명을 다했지만, 그렇게 썩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의 밑거름이 된다”라는 김수영의 “전통 복원의 의지”, “전통 회생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김수영이 단순히 동아시아 전통을 복원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수용해야 하는 서양문명과의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김수영은 해방 직후에 밀려든 서양 세력이 민족분단을 강요하는 부정성과 생활난을 해결해 주는 긍정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 전통도 생활난의 주범이라는 부정성과 민족통일을 위해 필수적인 정신이라는 긍정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김 교수는 “최초의 두 시 모두 김수영의 정신적 고향이 모더니즘보다는 동아시아 전통에 있음을 말해준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묘정의 노래」에서는 신탁통치를 추진하는 외세에 맞서는 민족주의자의 면모가 나타나는 반면에,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현실적인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문명을 수용해야 한다는 모더니스트의 모습도 함께 나타난다.


그는 해방 직후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민족주의와 생활난을 해결해 주는 서양문명 사이에서 다원주의적 긴장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해방 이후 연극에서 시로 전향한 김수영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묘정의 노래」는 내용상 모스코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부에서 시적 화자는 해방과 함께 “바람”처럼 몰아닥친 서양 세력들이 우리 민족의 전통을 상징하는 공간인 “남묘(南廟)”의 “굳은 쇠 문고리”를 열고 들어와서 결국 남편을 잃은 “과부(寡婦)” 신세처럼 민족을 분단해 버린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남방의 수호신인 “주작성(朱雀星)”이 북쪽으로 날아가다가 화살을 맞고 “반(半)절”이 되었다는 말도 외세의 공격으로 민족이 분단될 위기에 처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아아 어인 일이냐”라고 한탄하면서, “한아”(寒鴉, 까마귀)가 와서 “그날” 밤을 “반이나”이나 울었다며 반쪽이 되어버린 민족 분단의 아픔을 토로한다.


여기서 “그날”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된 1945년 12월 28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김수영은 신탁통치가 결정된 ‘그날’을 사실상 민족의 분단이 시작된 날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2부에서 시적 화자는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공간인 “남묘(南廟)”에서 너무도 “고요히” 잠들어 있는 “관공(關公)”의 “얼”을 깨우려고 한다.


그는 관공을 “백화(百花)의 의장(意匠)”과 “만화(萬華)의 거동(擧動)”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민족 정신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신탁통치가 결정된 “지금” 고요히 잠들어 있는 관공의 강인한 얼을 흔들어 깨워 외세가 강요하는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관공을 감도는 “향로(香爐)의 여연(餘烟)”을 찍어 “백련(白蓮)”을 무늬 놓는 “화공(=시인)”으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면서,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기 위해 관공처럼 강인하고, ‘백의민족(白衣民族)’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백련(白蓮)”처럼 순수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시인이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관공(關公)’은 삼국지로 유명한 중국의 관우(關羽) 장군이고, ‘남묘’는 조선시대에 그를 무왕(武王)으로 모신 사당인 남관왕묘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관우에 대한 신격화가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청대(淸代) 말까지 이어져 관우의 봉호(封號)가 ‘후(侯)-왕(王)-제(帝)-신(神)’으로 격상되어 갔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장군들이 대일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관우 장군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믿고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이후 정조는 무왕(武王)인 관왕묘를 문왕(文王)인 공자의 문묘에 버금가는 국가적 제례로 정착시켜서 문무겸치(文武兼治)를 달성하고자 했다.


김수영은 1965년의 산문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가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어린 시절의 성지”였다고 썼다. 그리고 거대한 관공(關公)의 입상(立像)이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고 밝혔다.


이 시에서 관공이 제시된 이유도 해방 이후 분단될 위기에 처한 민족의 “얼”이 거대한 관공의 입상처럼 외세에게 외경과 공포를 자아낼 만큼 떨쳐 일어나길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묘’가 시에서는 ‘남묘’로 바뀐 것도 남과 북의 분단 상황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가 “오늘도 우는 /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라는 탄식으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은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는 자신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다는 한탄과 함께 민족의 얼을 잃으면 짐승으로 전락한다는 경고의 의미로 보인다.


여기의 울음은 그의 초기 시에서 주로 나타나는 ‘설움’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현실을 설움의 힘을 통해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외세가 강요하는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인한 민족정신이 필요하다는 민족주의적 정치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공자의 생활난」에서 김수영은 민족 전통과 서양 문명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제시한다. 이 시에서 “공자(孔子)”는 물론 중국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조선시대에 문왕(文王)으로 국가적 제례의 대상이었다. 


그는 「묘정의 노래」에서 무왕(武王) 관공의 강인한 얼을 제시하더니, 여기서는 문왕(文王) 공자의 유교적 윤리를 민족의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예술가’나 ‘동아시아 구질서 지식인’이 아니라 꽃처럼 아름다운 민족의 전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해방 직후의 현실을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어 있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꽃은 공자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신과 전통을 상징하는 반면에, 열매는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서양의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어 있다는 말은 「이」(1947)에서의 “도립(倒立)”이라는 말처럼 꽃과 열매의 위치가 거꾸로 서 있는 “물구나무서기의 형상”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당면한 생활난 해결을 위해서는 먹을 수 있는 ‘열매=사물=문명’이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과거의 아름다운 ‘꽃=공자=전통’이 여전히 그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미곡의 자유시장에 관한 일반고시’ 제1호를 발표해 배급제를 폐지하고 미곡을 자유로이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여 일제 식민지 시대보다도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미군정은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식량 공출을 단행했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한 식량 공출은 물리력에 의해 강제된 강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식량 공출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을 초래해서 1946년 10월 인민항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제목도 아름다운 정신만 추구하다가 쌀값 폭등으로 인해 극심한 생활난에 빠진 공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줄넘기 작란”을 하고 있는 동무는 아름다운 전통을 무조건 부정하고 뛰어넘으려고만 하는 당시의 모더니스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 문명을 수용하더라도 민족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신중한 “작전”이 필요한데, 동무는 서양문명을 추종하면서 민족전통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작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꽃처럼 아름다운 민족 전통을 상징하는 ‘공자’가 아니라,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문명만 추종하고 있는 모더니스트인 ‘동무’이다. 이것은 「이」에서 민족 전통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도하던 당시의 반민족적인 “신문”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그가 추구하고 있다고 밝힌 “발산한 형상”도 민족의 전통을 부정해서 서양문명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전통이 함께 발전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생활난 해결을 위해 서양문명을 수용하다 보면 자칫 민족정신을 상실하고 또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시인은 “마카로니”보다 “국수”가 먹기 쉽기 때문에 그리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킨다. 민족에게는 낯선 문명에 대한 “반란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서양문명을 수용하더라도 고유한 민족정신을 상실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의 반란성은 이후 「아침의 유혹」에서 ‘습성’으로 변주된다. 이것은 당시 손문이 민족을 형성하는 다섯 가지 “힘”으로 제시했던 혈통, 생활, 언어, 종교, 풍속·습관 등과 관련이 있다. 그는 민족을 형성하는 이런 힘들이 “자연히 진화되어 생긴 것”이라고 하면서 민족의 자연성을 강조한다. 김수영이 여기서 제시하는 ‘반란성’도 손문의 ‘생활’과 ‘풍속·습관’처럼 민족의 자연성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그는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리고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 등을 바로 보겠다고 다짐한다. 사물, 즉 물질문명의 가치와 함께 그 한계도 직시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명석판명한 과학문명을 수용하면서도 우매한 물질만능주의에 빠지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생활난 해결을 위해 서양문명을 수용하되, 그 폐해도 바로 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수영의 ‘바로보기’를 “손쉽게 근대적 인식 일반과 등치시키는 오류”에서 벗어나, 문명과 전통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당면한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는 그만의 무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연에서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비장하게 말하는 것은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공자의 아름다운 정신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난을 극복하는 과학문명도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도(道)의 하나라는 강한 확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힌다. 


그는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정신만 고수하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현실적인 생활난 극복을 위해 서양 물질문명의 수용도 강조하는 세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는 공자로 상징되는 민족전통과 생활난으로 상징되는 서양문명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정치의식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김상환 교수는 이 시를 “동서 상상력의 교차”로 설명한다. 명석한 시선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방법과 도덕성을 추구하는 공자의 길이 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양과 서양의 이접적 종합을 의도하는 작시법”이 이후 “온몸의 시론”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김수영은「묘정의 노래」에서 무왕(武王) 관공의 강인한 얼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문왕(文王) 공자의 유교적 정신을 제시하면서 민족 전통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서양 문명을 수용해야 하는 필요성도 함께 제시하면 문명과 전통 사이에서 신중한 작전을 펼치기 위해 바로보기를 주문하고 있다. 


김수영은 한편으로는 민족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는 민족주의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문명을 수용하려는 모더니스트이다. 김수영은 서양문명과 민족정신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묘정(廟廷)의 노래(1945)

             

1   

남묘(南廟) 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과부의 청상(靑裳)이어라     


날아가던 주작성(朱雀星)

깃들인 시전(矢箭)

붉은 주초(柱礎)에 꽂혀 있는

반절이 과하도다     


아- 어인 일이냐

너 주작의 성화(星火)

서리 앚은 호궁(胡弓)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한아(寒鴉)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2     

백화(百花)의 의장(意匠)

만화(萬華)의 거동이

지금 고오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관공(關公)의 색대(色帶)로 감도는

향로의 여연(餘烟)이 신비한데    

 

어드매에 담기려고

칠흑의 벽판(壁板) 위로

향연(香烟)을 찍어

백련(白蓮)을 무늬놓는

이 밤 화공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공자의 생활난(1945)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과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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