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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Jul 30. 2021

일본 : 나가타겐지로, 현대식 교량

- 김수영의 다원주의(4)

일본 : 나가타겐지로, 현대식 교량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③일본/일본어 <친일파라 욕해도 맘껏 부려 썼다, 망령 씐 ‘식민지의 국어’>에서 김응교 교수가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민족과 민중의식이 없다는 해석은 왜곡"이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김응 교수의 말대로 김수영의 시에서 “‘친일문학=일본어 사용 / 민족문학=한국어 사용’이라는 낡은 이항대립”은 거부된다.


하지만 김 교수의 말처럼 일본어가 “식민지 시절에 그에게 씌워진 억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해방 직후 김수영의 시 가운데 일본이나 일본어에 대해 언급한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 문명과 민족정신 사이의 긴장 문제에 집중해 있었고, 1950년대 전쟁 이후의 시에서도 일본과 일본어의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김 교수는 1960년 사월혁명 이후 김수영이 「나가타 겐지로」(1960)와 「김일성 만세」(1960)를 함께 월간지에 발표할 작정이라고 쓴 일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왜 두 가지를 함께 발표하려 했을까. 두 가지 모두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일본이라는 억압, 후자는 냉전이라는 억압, 두 억압을 모두 직시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나가타 겐지로’와 ‘김일성 만세’는 일본의 억압과 냉전의 억압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냉전의 억압에 대해 사상의 자유로 맞서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가타 겐지로’에서도 초점은 일본이 아니라 냉전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 시에는 “불고기”를 씹던 사람들이 모두 별안간에 가만히 있는 장면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에 가는 친구의 잔치에서 재일교포 성악가인 나가타 겐지로(김영길)가 당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으로 “이북(以北)”으로 갔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그래서 자기가 다른 여가수도 같이 갔느냐고 물어보려는데 누가 벌써 재빨리 말꼬리를 돌려버렸다고 하면서 당시 사회 정치적 금기인 북한에 대한 일상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가 이 장면을 신의 “장난”에 비유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북이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등 당시의 사회 정치적 금기가 “신(神)”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신의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런 신의 장난에 그는 “농으로” 받아친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당시 사회 정치적 현실에 가벼운 농담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 자신이 농으로 대응했지만 재빨리 말꼬리를 돌려버리는 세인들의 모습에 씁쓸해한다. 그리고 이것을 신의 “꾸지람”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북한이라는 이념적 금기는 신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농으로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는 앞서 「허튼소리」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는 “허튼소리”를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용기”가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세인들이 갖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심이 절대적인 현실을 고발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이 1960년의 시 ‘중용에 대하여’에서 “일기의 원문은 일본어로 씌어져 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일본과 일본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 정부가 그만큼 악독하고 반동적이고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보아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당시 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김수영의 시에서 일본과 일본어의 문제가 시적 대상이 된 것은 1964년 한일협정 이후이다. 그는 1966년의 시 「눈」에 대한 시작 노트에서 자코메티, 수잔 손탁, 이상, 엘리엇 등을 거론하면서 2개 국어로 시를 쓰는 문제를 제기한다.


응교 교수는 김수영이 일본어로 글을 쓴 이유가 “일본어로 쓰면 죄를 짓는 양 괴로워하는 피식민의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김수영은 반대로 일본을 적대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기 위해서 일부러 일본어로 쓴다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김수영에게 일본은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전적으로 부정하는 대상이 아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얼마 전에 탈고된 「현대식 교량」에서 김수영은 사회 전반의 반일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적으로서의 일본과 형제로서의 일본 사이에서 갈등을 하면서도 과감하게 미래를 위해 형제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시의 첫머리에서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고 밝힌다. 여기서 현대식 교량은 “회고”, “식민지”, “이십 년 전”, “역사”, “적” 등이 직접 언급된 것으로 보아 당시 추진되고 있던 한일협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을 다시 잇는 현대적인 다리라는 것이다.


그가 “식민지 곤충들”은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도 모르고 자기 다리처럼 건너 다닌다고 비판하는 것도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죄를 지은 일본과 다시 손을 잡으려는 당시의 독재정권을 풍자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고 한탄하면서, 자기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키는 연습을 무수히 해 왔다고 강조한다.


젊은 세대들은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못해서 한일협정의 부자연스러움을 모르지만, 자신은 한일협정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울분을 참기 위한 연습을 무수히 해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 이야기는 이십 년 전 이야기이지요”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현대식 교량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이러한 반항”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 머물러 있는 시대착오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과 “신용”을 더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여유”와 “새로운 역사”를 추구하고자 한다.


한일협정 문제는 과거의 민족 감정에 치우쳐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 생활의 여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랑의 길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고 말한다.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기차처럼 오가는 세대 간의 소통이 중요하는 말이다.


다리가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라는 말도 한일협정이 바로 세대간 소통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시인은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라고 정리한다. 늙은 과거에만 머물지 말고 젊은 미래를 위해 다리(한일협정)를 놓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한일협정이 “정말 희한한 일”이지만 미래를 위해 “적”을 “형제”로 만드는 “사랑”의 실증일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위해 적도 형제로 만들 수 있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일본은 친일과 반일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과거 식민 지배자인 적으로서의 일본과 미래의 문명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형제로서의 일본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나가타 겐지로(1960)

      

모두 별안간에 가만히 있었다

씹었던 불고기를 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

아니 그것은 불고기가 아니라 돌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


(그리 흥겨운 밤의 일도 아니었는데)

사실은 일본에 가는 친구의 잔치에서

이토츄[伊藤忠] 상사의 신문광고 이야기가 나오고

곳쿄노 마찌 이야기가 나오다가

이북으로 갔다는 나가타 겐지로 이야기가 나왔다


아니 김영길이가

이북으로 갔다는 김영길이 이야기가

나왔다가 들어간 때이다


내가 나가토[長門]라는 여가수도 같이 갔느냐고

농으로 물어보려는데

누가 벌써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

신은 곧잘 이런 꾸지람을 잘한다     


현대식 교량(1964)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이십사 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이십 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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