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④ 만주 이주 <패배하듯 쫓겨간 만주, 배반을 끌어안고 ‘바로 보다’>에서 박수연 교수는 “일본 유학은 그의 자발적 선택이었고, 만주 이주는 패배하듯이 쫓겨간 삶”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김수영의 삶의 전체는 바로 이 배반의 상처와 돋아난 새살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강조한다.
김수영의 시에서 일본 유학과 만주 이주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박 교수의 말대로 ‘배반’을 김수영 시적 사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박 교수가 “김수영에게는 일본, 만주뿐만 아니라 미국도 바로 보아야 할 대상이었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박수연 교수는 김수영의 시 「아메리카 타임지」(1947)에서 “서정적 정서마저 객관화하는 태도야말로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고 진실을 환기하려는 김수영의 시정신에 핵심적으로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시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첫 연에서 “지나인(支那人)의 의복”으로 상징되는 중국 문명이 쇠퇴하자, “기회”와 “유적(油滴)”, 즉 석유로 상징되는 풍요의 땅이자, 생활의 여유를 상징하는 “능금”으로 대표되던 미국 문명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또 하나의 해협”을 찾아 “아메리카”로 떠났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미국 문명의 허상을 깨닫고 민족적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참회하며 흘린 눈물이 “응결”되어 단단한 “바위” 같은 외세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긍지를 나타낸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와사(瓦斯)의 정치가”를 직접 호명하면서 그들이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지”의 “활자”를 미화하면서 그대로 따르기만 하는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와사의 정치가는 미국만 추종하면서 민족정신을 상실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치가들을 주체성이나 실체도 없는 가스(gas)에 불과한 존재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그가 미국을 직접 비판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탈고일로 보아 1947년 11월 14일 미국이 주도한 유엔총회의 총선거 결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아메리카”, “타임(Time)지”와 함께 호명하고 있는 와사의 정치가들은 당시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 정책을 그대로 추종하는 이승만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수영은 단순히 미국 문명의 허상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대주의적 정치가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함으로써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에 울었던 것이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미국 문명을 여전히 추종하는 와사의 정치가들을 거듭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본다”, “보고”, “응시한다”라는 서술어를 반복하면서 미국을 바로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미국이 추진하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민족 분단을 막아내려는 민족주의적 정치의식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박수연 교수는 김수영의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1947)에서 “미국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에 비유하는 시인의 언어는 그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성찰의 지혜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시도 단순히 객관적 성찰의 지혜가 아니라, 생활난을 해결을 위해 필요한 미국 문명과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인 미국 사이의 갈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시의 첫 머리에서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먼 바다를 건너온 “서적”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책을 “주변없는 사람”이 만지면 “죽어버릴듯 말듯 되는 책”이라고 하면서, 미국의 물질문명이 이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주변 없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민족적 주체성을 상실한 채 미국의 물질문명을 추종하면 결국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또다시 민족의 죽음을 맞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무서운 책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의 긴긴 역사”를 갖춘 “엄연한 책”이기 때문에 “괴로운 잠”을 이룰 준비를 해야 할 시간임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보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자신과 “어린 동생”을 비롯해서 미래에 우리 민족의 괴로운 “생활난”(공자의 생활난)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거듭 토로하고 있는 “괴로움”의 실체도 단순히 미국 문명의 위험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번쩍이고 있는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그저 “멀리 보고 있는 듯한 것이 타당”한 현실 때문이다.
정작 그가 괴로워하면서 “이를 깨물고” 있는 것은 미국 문명을 가까이 하고 싶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현실이다.
그는 분단이라는 민족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생활난 해결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물질문명을 수용할 수 없는 현실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공자의 생활난」에서 “반란성”에 기대를 걸고 서양 문명 수용에 자신감을 보였었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미국 문명을 수용하는 것이 민족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괴로움이 주된 정조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47년 유엔총회의 총선거 결정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미국 문명을 수용하는 것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미국의 입장을 긍정하는 것이 되므로 분단이라는 민족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의 핵심어는 ‘배반’이나 ‘성찰’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긴장’이다. 그는 해방 직후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로서의 미국과 생활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미국문명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