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시론>에 나타난 긴장을 중심으로
앞에서 김수영이 <반시론>에서 ‘배부른 시’라고 명명한 <라디오 계(界)>, <먼지>, <성(性)>, <미인(美人)>을 <반시론>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하여 자세히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이들 작품에서 초월적인 시와 현실적인 반시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라디오 계(界)>에서 현실적인 생활을 긍정하는 반시를 제시한 반면에 <먼지>에서는 초월적 정신을 긍정하는 시를 제시하면서 작품들 간의 긴장을 추구하고 있다. 이와 달리 <성(性)>과 <미인(美人)>에서는 한 작품 내에서 현실성과 초월성을 보다 균형 있게 제시함으로써 작품 내의 긴장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한 작품 내에서만이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 여러 작품들 사이에서도 긴장의 시론을 중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김수영은 <반시론>의 첫머리에서부터 이러한 다원주의적 긴장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문학에는 숙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곡예사적 일면이 있다. 이것은, 신이 날 때면 신이 나면서도 싫을 때는 무지무지한 자기 혐오를 불러일으킨다.”라고 하면서, 신바람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곡예사”처럼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긴장’을 문학의 “숙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신이 나는 초월적인 ‘시’와 혐오스러운 현실적인 ‘반시’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양극단 사이에서 곡예사처럼 다원주의적 긴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무리 부분에서도 <반시론>의 핵심을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으로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제는 ‘유심론=과거=뮤리얼 스파크=릴케’로 연결되는 초월적인 시와 ‘유물론=미래=스푸트니크=브레히트’ 등으로 연결되는 현실적인 반시를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다원주의적 긴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무한한 순환. 원주(圓周)의 확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제시하는 시론이 긴장의 일원론적 종결이 아니라, 무한한 긴장 자체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귀납과 연역, 내포와 외연, 비호(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 무한한 순환. 원주(圓周)의 확대, 곡예와 곡예의 혈투. 뮤리얼 스파크와 스푸트니크의 싸움. 릴케와 브레히트의 싸움.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 반시론의 반어.
그가 <반시론>에서 제시한 “무한한 순환”으로서의 긴장은 헤겔 변증법보다는 비슷한 시기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으로 제시했던 하이데거의 긴장론에 보다 가깝다. 여기서 그는 시가 형식이나 내용 중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내세우거나 산술적인 반반을 그저 섞어 놓는 것이 아니라, 시의 형식(예술성=대지)과 시의 내용(현실성=세계)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긴장은 양극의 종합을 추구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무한히 벌어지는 싸움 자체를 추구하는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다원주의적 긴장은 현실적 즉자와 초월적 대자 사이의 긴장을 제시하는 사르트르의 존재론과도 쉽게 연결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존재를 현실적인 ‘즉자(卽自, en-soi)’와 초월적인 ‘대자(對自, pour-soi)’로 구분한다. 그리고 현실적 즉자와 초월적 대자의 관계를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적대하는 두 개의 힘에서 생기는 긴장”으로 파악한다. 즉자와 대자는 헤겔의 변증법처럼 양자가 통합되는 통일적 전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분열상태”에 놓여 있는 “통합해소적인 전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순수한 현실론이나 순수한 초월론에 빠지지 말고 “내재적인 어투로 얘기하는 ‘동시에’ 초월적인 어투로 얘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김수영의 시와 반시의 무한한 긴장도 상호 독립적인 전체라는 의미에서 통합해소적인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의 다원주의적 긴장은 현대의 철학적 사유를 대표하는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분법을 바탕으로 하는 헤겔 변증법의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면서, 각각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되기=생성’의 방식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어 나가는 연속적인 다양체를 제시하고 있다.마찬가지로 김수영이 말하는 시와 반시의 무한한 긴장도 각각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생성을 추구하는 다양체로서 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김수영의 다원주의적 긴장은 당시 순수시와 참여시, 남과 북,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등의 이분법적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현대의 ‘경합적 다원주의’ 논의와도 직결된다. 특히 샹탈 무페는 여러 관점과 가치가 존재하는 다원적인 세계에서 이성에 근거한 보편적 합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리고 “정치적 동일성을 형성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의 조건이 동시에 사회로부터 적대가 제거될 수 없는 불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하면서, “적대의 항상-현존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무페가 제시하는 적대와 갈등은 “타자를 괴멸시켜야 하는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격렬하게 다툴지라도 자신의 이념을 옹호할 그들의 권리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대결자로 보는 것”이다. 무페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적대를 아예 부정하거나, 반대로 적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적대가 아니라, 대결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경합하면서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경합적 다원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김수영이 시와 반시, 순수시와 참여시,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등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무한한 긴장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사유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김수영 후기 시의 정치성을 초월적인 정신에만 주목하여 무정부주의로 파악하거나, 반대로 현실적인 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어 소시민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면적인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김수영의 <반시론>은 기존의 연구처럼 하이데거 철학이나 반어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는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시와 반시, 순수시와 참여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1960년대 중반부터 주장해 왔던 다원주의적 긴장의 시론을 구체적인 작품들의 시작 노트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완숙한 시론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이건주, <김수영의 다원주의 시론 연구 - <반시론>에 나타난 긴장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제73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21, 7-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