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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Aug 13. 2021

전통 : 더러운 향로, 거대한 뿌리

- 김수영의 다원주의(11)

전통 : 더러운 향로, 거대한 뿌리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⑪ 전통 <‘치욕의 역사’ 부단한 성찰 끝에 생성의 뿌리를 찾았다>에서 남기택 교수는 “전통과 문명을 대비하며 근대성을 천착하는 방식은 서구 모더니즘의 지적 관성”이라고 하면서, 김수영도 문명과 대비해서 “시인으로서의 이력 내내 전통에 관해 성찰”했다고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수는 김수영이 “전통적 배경에서 자아와 세계관이 형성”된 “지극히 전통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에서 “전통에 대한 그의 정서는 부정적”이었다고 설명한다.


‘묘정의 노래’(1945), ‘아버지의 사진’(1949), ‘더러운 향로’(1954) 등에 “전통 혹은 전근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 자의식”이 유사하게 반복된다는 것이다.      


김수영의 전통에 대한 태도가 “질적 전환”을 이루는 시기를 남 교수는 1960년대 이후라고 설명한다. 특히 ‘파리와 더불어’(1960)에서 “문명에 의해 점차 밀려나는, 설움의 대상이자 소극적 존재”로서의 전통이 마치 “최후의 보루”와 같이 “거대한 비애”이자 “거대한 여유”의 견인차로 전환된다고 본다.


이 시부터 “치욕의 대상이었던 전통을 거대한 치유의 기원”으로 삼게 되는 “양질 전화의 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영의 전통에 대한 태도가 질적인 전환을 보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해방기부터 민족 전통과 서양문명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다.


「묘정의 노래」에서는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 강인한 민족 정신을 제시했던 반면에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당면한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문명의 수용을 강조하기도 했다.


남 교수는 김수영이 1965년의 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등단작인 「묘정의 노래」노래를 스스로 비판하면서 마음의 작품 목록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했다는 것을 근거로 초기 전통에 대한 그의 정서가 부정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미숙한 초기작에 대한 부끄러움 이상이 아니라고 본다. 김수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편으로는 민족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문명의 가치를 인정하는 모더니스트였다.


달리 말하면, 그는 민족의 전통과 서양의 문명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였다.


남 교수의 해석과 달리「더러운 향로」(1954)에도 전통을 긍정하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난다. 그는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을 감추겠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나의 그림자’는 이기적인 물질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작 노트라고 볼 수 있는 1956년 2월 9일 일기에서 인간은 “나무 위에서 떨어진 새”처럼 “처참한 추락”으로 인해 “신(神)”이 가슴에서 사라지고 “시체와 같은 그림자”를 저마다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보아 그림자를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인간을 시체로 만드는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처럼 용감하게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에서부터 자신을 감추겠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적”, “벗”, “땅”에 갇혀 있는 편협한 민족주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인류적 차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고궁”에 있는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愛兒)”를 찾은 듯이 “우는 날”, 즉 분단으로 잃어버린 반쪽을 찾은 민족통일의 날이 오더라도 물질적 욕망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고독”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힌다.


앞으로 민족이 통일되더라도 전통을 절대시하는 민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철망을 지나는 비행기의 그림자”처럼 전쟁으로 증명된 파괴적인 물질문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 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향로를 좋아하는 이유가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그림자인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향로도 전통과 역사 자체를 절대시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인류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향로와 같이 있을 때 향로도 살아있고, 자신도 소생한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개인적인 물질적 욕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향로를 추구해야 소생할 수 있는 것처럼, 향로도 그의 그림자인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서 인류적 차원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느냐고 거듭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은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아까운” 길이자,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는 “더러운 길”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후 「거대한 뿌리」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우리 전통이 서양의 물질문명에 비해 기이하고 더럽고 전근대적이지만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것은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민족의 전통을 추구하는 편협한 민족주의는 더러운 길이지만, 인간성 회복의 전제 조건인 민족통일을 위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1968년의 산문「반시론」에서 명료하게 서술하듯이 민족통일은 “종점”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1961년의 산문 「저 하늘 열릴 때」에서 ‘통일’이 되어도 시 같은 것이 필요할까 하는 문제라고 묻고는 ‘더 필요하다’고 스스로 답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세계적인 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시”, “좀 더 가라앉고 좀 더 힘차고 좀 더 신경질적이 아니고 좀 더 인생의 중추에 가깝고 좀 더 생의 희열에 가득 찬 시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도 통일이 되어 “정신상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남기택 교수는 「거대한 뿌리」(1964)에서 전통은 “확연한 긍정이요 나아가 사랑이자 인간 자체”가 되었다고 적절하게 설명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외세에 맞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첫머리에서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술자리에서도 “남쪽식”으로 앉았다가 “이북 친구”들과 만날 때는 ‘앉음새’를 고친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전통을 상실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마저 달라지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김병욱”이라는 시인이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임에도 불구하고 “8‧15” 해방 이후에도 우리의 전통적인 앉는 법을 잊어버리고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하였다고 비판한다. 분단이 지속되면 남북 공통의 민족 전통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증언하는 조선시대의 “극적인 서울” 풍경과 “기이한 관습”을 인용하면서, 그녀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고 오히려 황송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라며 전통의 가치를 거듭 강조한다.


그는 과거 가난하고 전근대적이었던 “우울한 시대”마저 오히려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하면서 대단히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더러운 전통과 역사를 찬양하는 이유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과 “사랑”이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족의 전통과 역사가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음으로써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영원성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와 /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민족 분단이 서양문명의 산물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비판으로 보인다.


민족통일이나 중립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민족을 분단시킨 서양문명과 이데올로기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다.


그가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그리고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를 모두 비판하는 것도 “미국놈”으로 대표되는 서양문명을 추종하는 세력들이라면 누구든 부정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외세와 여기에 기생하는 반민족 세력들을 몰아내야 민족통일도 중립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대신에 그는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처럼 차라리 “무수한 반동”이 더 좋다고 말한다.


비록 민족의 전통이 전근대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반동적인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것이므로 서양문명보다 좋다는 뜻이다.


특히 그는 이들을 길게 열거하면서 이들이 바로 민족통일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통일의 주체는 당연히 우리 민족일 수밖에 없으므로 기이하고, 더럽고, 반동적일지라도 우리의 민족과 전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외세에 맞서서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민족통일의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3인도교”의 철근 기둥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물질문명은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상징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까치”나 “까마귀”로 상징되는 외세와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뿌리를 제시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물론 여기서 거대한 뿌리는 공동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상징한다. 그는 분단으로 인해 사라질지도 모르는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영원히 지키기 위해서는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민족의 거대한 뿌리를 이 땅에 박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는 초지일관 “전통을 현재화하며 새로운 문학사의 지평을 모색”한 민족주의적인 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과 역사를 절대시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나, 서양문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폐쇄적인 국수주의자가 아니다.


김수영은 민족의 전통과 서양의 문명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더러운 향로」(1954)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 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 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검은 철을 깎아 만든

고궁의 흰 지댓돌 위의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愛兒)를 찾은 듯이

너의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

우는 날이 오더라도     


철망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보다는 훨씬 급하게

스쳐가는 나의 고독을

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잡을 수 있겠느냐

향로인가 보다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 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여 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 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티끌도 아까운

더러운 것일수록 더한층 가까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 보는

이 더러운 길     


「거대한 뿌리」(1964)

 

거대한 뿌리」(1964.2.3.)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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