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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Aug 22. 2021

민주주의 : 꽃잎

- 김수영의 다원주의(12)

민주주의 : 꽃잎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⑬ 꽃 <자유, 혁명, 사랑…시적 모험이 그려낸, 시들지 않는 ‘사상 개화’>에서 오연경 교수는 김수영 시인이 “평생 이분법과 싸워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적절하게 설명한다.

     

연경 교수는 김수영 시인이 통과했던 식민지와 해방, 전쟁과 분단, 냉전과 이념 대립, 혁명과 반동의 역사를 “이분법적 이데올로기”가 정치와 제도뿐 아니라 예술과 생활 전반에 걸쳐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냉전 시대로  규정한다.


그리고 김수영이 냉전을 “남북, 미·소의 체제 갈등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물을 얼어붙게 하고 우리의 문화를 불모케 하는 온갖 경직된 관념들”로 인식하고, “냉전의 해소”를 시대의 과제이자 시의 과제로 인식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김수영 시의 핵심을 제대로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수영이 “자연이나 전통과 관련된 시어들”을 멀리했다는 오 교수의 분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김수영이 “철저한 도시인이었고 현대성을 천착했으며 우물 속에 빠진 민족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자연(시골), 전통, 민족의 가치를 중시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토끼」(1949)에서 바람과 새, 갈대부터 후기의  「풀」(1968년)에서 풀과 바람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서 자연과 관련된 시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에 꽃과 관련된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의외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좌우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문명과 자연, 세계와 민족의 이분법과도 싸웠던 다원주의자였다.


오 교수는 꽃이 처음 등장하는 「공자의 생활난」(1945)에서 김수영이 “꽃이라는 단어에 씌워진 숱한 관념과 이미지를 지우고 꽃의 생리와 수량과 한도와 우매와 명석성을 바로 보고자 했다.”라고 설명한다. 사물에 대한 정직한 직시로부터 시의 길을 찾아보겠다는 선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다른 글에서 분석한 것처럼, 여기서 꽃은 공자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신과 전통을 상징하고, 열매는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서양의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어 있다는 말은 생활난 해결을 위해서 먹을 수 있는 ‘열매=사물=문명’이 가장 중요한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꽃=공자=정신’만 중시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직후 터진 쌀값 폭등 문제처럼 당면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꽃처럼 아름답기만 한 민족의 정신이 아니라 서양의 물질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오연경 교수는 꽃에 대한 김수영의 지속적 탐구가 “자유와 혁명과 사랑이라는 꽃의 사상”으로 만개한 작품이 「꽃잎」(1967)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시에는 “반복과 변주를 통한 의미의 구축과 해체, 이를 통해 언어의 서술(내용)과 언어의 작용(형식)이 하나의 리듬을 생성”해내는 형식 실험이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사월혁명 이후 김수영이 생활과 시를 끌고 갈 힘을 “부정의 정신”이 아니라, “여유, 긍정, 사랑” 등에서 찾았는데, 이것이 “사물 자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주체와 언어와 사물이 자율적으로 이행하는 시의 형식에 대한 실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김수영이 「눈」(1966)의 시작 노트에서 “자코메티적 발견”이나 “수잔 손탁의 「스타일론」”, “앨런 테이트”의 “Tennyson(긴장)의 시론”등을 언급하면서 형식 실험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꽃잎」 연작은 ‘의미의 구축과 해체’라는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김수영 시의 비밀은 상징에 있다. 그의 시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표면적 의미만 보고 이면적 상징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도 꽃잎은 자연적 사물이 아니라, 선거와 투표라는 정치적 상징으로 봐야 의미를 포착해낼 수 있다.


먼저, 「꽃잎 1」은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에 탈고된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머리”를 숙이고 존중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평범한 것은 제목인 꽃잎을 가리키는데, 국민들이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투표용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를 국민들이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투표용지를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꽃잎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많이는 아니고 조금”,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이라며 ‘조금’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선거가 정권교체를 가능하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가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대통령 선거가 “바람”, 즉 소망하는 정권교체를 가져올 수 있을지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거룩한 산”에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선거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리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난다”는 말은 정권이 계속 교체될 수 있는 선거제도의 속성에 대한 설명이고, “임종의 생명” 같다고 말하는 것도 선거의 효력이 대통령 임기 동안만 유지되므로 임종을 앞둔 생명처럼 한시적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이 지닌 “혁명” 같은 힘에 주목한다. 민주적인 선거제도에서는 “작은 꽃잎” 같은 투표용지 하나로 “큰 바위” 같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선거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작은 꽃잎이 떨어져서 큰 바위가 떨어지는 것인데 큰 바위가 먼저 떨어져 내리고, 작은 꽃잎이 나중에 떨어진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만큼 작은 꽃잎이 능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작고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바위와 작은 꽃잎이 만들어내는 운동, 단절과 지속이라는 혁명의 리듬”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바위 같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선거혁명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통령 선거 얼마 후에 탈고된 「꽃잎2」에서는 우리의 “고뇌”, “뜻밖의 일”,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꽃을 달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 탈고된 것으로 보아 뜻밖에도 패배한 아까의 시간과는 다른 선거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노란 꽃”, “금이 간 꽃”, “하얘져 가는 꽃”, “넓어져 가는 소란”을 달라고 하는 것도 꽃이 금이 가고 하얗게 시들어가듯이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에 실패했지만 선거제도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수”를 지우고, “우리가 아닌 것”과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도 기대했던 선거에서 원수를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거룩한 우연을 기다리자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가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고, 모든 꽃잎을 믿으라고 거듭 말하는 것도 비록 이번 선거에서는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민주적인 선거제도의 힘과 가치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안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못 보는 글자”, “떨리는 글자”, “빼먹은 꽃잎”, “보기 싫은 노란 꽃”처럼 문제점과 한계가 많지만,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시는 “반복구 속에서 의미의 축적이 거듭될수록 우연과 혼란이 확산되는 전개”를 통해는 “말의 교환과 실패, 완성과 결핍을 왕복하는 시의 의미 작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선거제도의 가치와 힘에 대한 믿음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꽃잎3」에서는 “순자”가 “더워져 가는 화원”에서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순자는 “열네 살 우리 집에 고용을 살러” 왔다는 말로 보아 14년 전쯤, 즉 1952년에 처음 직선제로 실시되었던 대통령 선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더워져 가는 화원에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처럼  ‘순자=선거’가 군사정권이 기승을 부리는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와 자유의 소식을 완성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순자가 “우주의 완성을 건 한 자(字)의 생명의 귀추를 지연”시킨다는 말도 선거제도가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녀는 나이를 초월한 것”이고, 순자는 “어린애”도 “어른”도 아니고, “꽃”도 “어제 떨어진 꽃잎”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민주적인 선거제도는 시간과 무관하게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특히 시인은 “떨어져 물 위에서 썩은 꽃잎이라도 좋고”, “썩는 빛이 황금빛에 닮은 것”이 너 때문이라고 하면서, “내 웃음”을 받지 않는 것처럼 비록 지더라도 민주적인 선거는 황금만큼이나 귀중한 제도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시인은 순자가 “썩은 문명”과 “어마어마한 낭비”, “공허한 투자”, “대한민국의 전 재산인 나의 온 정신”을 비웃는다고 하면서 민주적 선거 제도를 갖추지 못하고 초월적인 정신과 고독만 추구했던 우리의 전근대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순자가 집에 오자마자 자신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 “둔갑한 영혼”, “더러운 고독”, “음탕한 전통”을 알았다고 하면서 전근대적 전통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그래서 시인은 더워져 가고, 더러워져 가는 화원에서 찾아오지 않는 벌과 나비의 소식, 즉 독재정권 아래에서 사라지고 있는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식을 완성하기까지 민중들의 치열한 “아우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벌과 나비가 오지 않는 “캄캄한 소식”을 완성하는 그날을 위해 “실낱”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노래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없이” 웃는다고 하면서, 실낱같은 여름 바람, 여름 풀의 아우성을 호명한다.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서 실낱 같은 바람과 풀처럼 미약한 민중의 힘으로도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작은 꽃잎 같이 평범하고 아름다운 선거제도가 실낱같이 미약한 민중들의 바람을 실현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운 길이라는 말도 된다.       


연경 교수는 이 시에서 김수영이 바람, 풀, 꽃잎, 순자와 같은 실낱같 존재들로 실패한 혁명, 실패한 시의 실낱같은 완성을 도모했다고 하면서, “‘조금’의 작은 움직임으로 시작하여 ‘웃음’과 ‘아우성’으로 증폭되는 변화무쌍한 꽃잎의 리듬이 혁명 이후의 시간을 지속하는 힘, 해학과도 같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 시와 삶을 긍정하는 사랑의 실천”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시는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민주적인 선거혁명의 가치와 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꽃잎 같이 평범하고 아름다운 선거제도가 실낱같이 미약한 민중들의 바람을 실현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운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초월적인 정신만 추구했던 전통을 비판하고 서양의 민주적 선거제도를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다른 글에서도 분석했듯이 그가 전통을 긍정하는 작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수영은 언제나 중간에만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문명과 전통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다원주의자였다.



꽃잎(1967)


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3
순자야 너는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하고


우주의 완성을 건 한 자(字)의 생명의
귀추를 지연시키고
소녀가 무엇인지를
소녀는 나이를 초월한 것임을
너는 어린애가 아님을
너는 어른도 아님을
꽃도 장미도 어제 떨어진 꽃잎도


아니고
떨어져 물 위에서 썩은 꽃잎이라도 좋고
썩는 빛이 황금빛에 닮은 것이 순자야
너 때문이고
너는 내 웃음을 받지 않고
어린 너는 나의 전모를 알고 있는 듯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
너 혼자서 깜찍하고나


네가 물리친 썩은 문명의 두께
멀고도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낭비
그 낭비에 대항한다고 소모한
그 몇 갑절의 공허한 투자
대한민국의 전 재산인 나의 온 정신을
너는 비웃는다


너는 열네 살 우리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지
3일이 되는지 5일이 되는지 그러나 너와 내가
접한 시간은 단 몇 분이 안 되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느냐 나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를
나의 못 보는 눈을 나의 둔갑한 영혼을
나의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을
나의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을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의
꽃과 더러워져 가는 화원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오늘도 찾아오지 않는 벌과 나비의
소식을 더 완성하기까지


캄캄한 소식의 실낱같은 완성
실낱같은 여름날이여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없이 웃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단한 진리에 웃는
너무 진리가 어처구니없이 간단해서 웃는
실낱같은 여름 바람의 아우성이여
실낱같은 여름 풀의 아우성이여
너무 쉬운 하얀 풀의 아우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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