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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Oct 09. 2021

제3지대 다원주의자 김수영

- 김수영의 다원주의(1)


한겨레신문에서 [거대한 100년 김수영]을 매주 연재하고 있다. 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신문에서 오랫동안 연재하고 있는 것은 김수영 연구자로서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연재되고 있는 글들도 대부분 합리적이고 내용도 충실해서 많이 배우고 있다.


다만,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100년”을 기념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하게도 그를 찌질한 시인이니 여혐 시인이니 하면서 비난하는 글들도 적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더구나 그의 시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생략하고, 관련 구절들을 아전인수식으로 발췌해서 자신의 관점에 맞추다 보니 과녁을 빗겨 가거나 심지어 곡해하는 글들도 적지 않다.


시인에 대한 연구가 작품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수영의 시들을 난해시라며 제대로 분석도 하지 않은 채 비판만 하는 글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여전히 김수영의 시에 대한 평가가 작품 자체가 아니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진영논리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관행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김수영은 물질과 정신, 생활과 예술, 문명과 전통, 개인과 사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시와 반시 등 양극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적인 시인이다. 그의 다원주의적 사유는 민중에서 시민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 다시 조명되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미 강동호 교수는 김수영의 시에 대한 백낙청 교수의 비판적 독해를 분석한 논문에서 김수영 시인이 비판받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백낙청 교수는 1969년의 <시민문학론>에서 “1960년대 한국 시민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는 김수영의 작업”이라고 상찬했지만, 70년대 중반 민족문학론을 주창한 이후에는 지식인의 소시민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민중적 자세”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김수영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백낙청 교수가 <시민문학론>에서 제시했던 주체는 “소시민성에서 탈피한 시민다운 시민, 즉 bourgeois와는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citoyen이다.” 그가 말하는 시민은 부르주아로 전락한 서구적인 소시민이 아니라, 진정한 시민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원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주체인 것이다.


 “1960년대 한국 시민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는 김수영의 작업”이라고 하면서, “시민문학론의 이론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검증 텍스트”로서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호명다. 이 시기에 낙청 교수 김수영의 시에 나타나는 소시민성을 옹호하면서, “현실의 옹졸함을 폭로하는 김수영의 자기반성적 태도”로 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응시하면서 과도한 절망에 빠지지 않은 김수영의 태도야말로 서구에 대한 맹목적 추수 속에서 나타난 당대의 소시민 의식과 구분된다는 결정적인 표지”로 평가했다. 자신의 한계 자체와의 싸움을 자각한 것만으로 충분히 소시민성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박정희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탄압이 더욱 심화되고 문학의 운동성이 정치적으로 부각되면서 ‘시민’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변혁적 주체가 요청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백낙청 교수는 자신의 시민문학론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족과 민중이라는 새로운 변혁적 주체를 비평이론의 화두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시민이라는 주체가 미래를 위한 이상으로 내걸려 있는 미완의 주체라면, 민족(민중)은 더 이상 이러한 추상적인 미완의 상태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미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며, 나아가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거듭나야 할 필연성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가 바로 민중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에서 민중으로’의 변화는 근본적인 전환이라고 할 만하다. 이로부터 김수영은 “민족과 민중의 잠재역량을 너무나 등한히” 했던 소시민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수영의 작품을 자세히 독해해 보면, 그를 소시민적이라고 비판할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가 자신의 소시민성을 반성하는 것도 대시민을 지향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것도 소시민적인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생활난 해결을 개인과 사회의 필수적인 과제로 제시하는 민중적 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김수영 시의 난해성을 지식인적인 소시민성의 한계로 지적하는 것도 문제이다. 김수영의 시는 이상의 초현실주의나 후기 김춘수의 무의미시처럼 의미를 변형하거나 배제하는 난해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는 그의 말대로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무의미에 도달하려는 시로서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그가 심어 놓은 상징의 숲을 끈기있게 헤쳐가다 보면 의미의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김수영의 시는 난해시도 아니고 소시민적인 시도 아니다. 그는 민족이나 민중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리얼리스트이면서도, 이를 생경한 날것으로 내놓지 않고 상징적으로 형상화했던 모더니스트이다. 김수영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불철저한 리얼리스트나, 반대로 리얼리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불철저한 모더니스트가 아니다.


이런 평가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어느 하나를 적대시하면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진영주의자들의 편협한 논리이다. 리얼리즘은 선이고 모더니즘은 악이라거나 반대로 모더니즘은 선이고 리얼리즘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유는 시대착오적인 좌우 진영논리의 문학적 표현일 뿐이다.


김수영은 내용과 표현, 사상성과 예술성,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가치를 모두 긍정하면서 그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말 그대로 시인이다. 내가 김수영의 산문 <반시론>을 분석한 논문 <김수영의 다원주의 시론 연구>에서 밝혔듯이 그는 당시 좌우 이념대립이나 이분법적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물질과 정신, 문명과 전통, 예술과 생활, 시와 반시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다원주의적 사유는 초기 시인 「토끼」(1950)에서부터 후기 시인 「풀」(1968)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토끼」1부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물질적 생활을 위해 돈을 버느라 뛰어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을 제시하는 반면에 2부에서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초월적 정신을 추구해야 또 다른 운명을 제시하고 있다. 토끼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초월적 정신과 물질적 생활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해야 되는 인간의 다원주의적 운명을 상징한다.


그는 마지막 시인 「풀」에서도 풀과 바람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사유를 제시한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누워서 초월적인 바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비가 개고 날이 맑아지면 현실적인 풀의 세계로 다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초월적인 바람의 세계나 현실적인 풀의 세계 어느 한 극단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간적 상황에 따라 무한히 순환하는 중용적 다원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중용(中庸)을 이렇게 해석다. "중(中)은 치우치지도 않고, 어디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다. 용(庸)은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인 평상(平常)이다."(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 平常也)


강준만 교수가 "중도운동은 정치운동인 동시에 생활운동이어야 한다."라고 한 말도 이러한 중용의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 보다. "중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집단사고와 진영논리를 따라하지 않으면 피곤하고 차별받는 사회”(김진석)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감정과 태도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의 양극에 빠지지 않는 중도적 덕성”(채진원)을 키워 나가야 한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성찰을 요구하는 바, 중도를 생활양식으로 체화시킬 때에 비로소 정치운동으로서의 중도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중도운동은 정치운동인 동시에 생활운동이어야 한다."


「중용(中庸)」제2장에는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나다.“군자의 행위는 중용을 지킨다. 그러나 소인의 행위는 중용에서 어긋난다. 군자가 중용을 행함은 군자다웁게 때에 맞추어 중(中)을 실현한다. 그러나 소인이 중용을 행함은 소인다웁게 기탄(忌憚)함이 없다."(君子 中庸, 小人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김용옥 교수는 『중용한글역주』에서 중용의 핵심으로 시중(時中)을 제시하면서, 이를 시간적 상황에 알맞게 행위하는 것으로 풀이다. “시간에는 본시 절대적 시(始)도 없고 절대적 종(終)도 없는 것이다. “중(中)”이란 이러한 시간적 존재의 앎의 방식의 가장 근원적인 양태이다. 따라서 그 “중(中)”은 기하학적 미들(middle)이 될 수 없으며, 어떻게 시공적 상황에 알맞게 그 중(中)을 발현하느냐, 하는 “시중(時中)”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중(中)” 그 자체가 “시(時)”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중용, 즉 치우치지도 않고, 어디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는 평균적 중간 지대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상황에 따라 찾아가는 것이라고 이해다.


김수영이 일과 휴식, 낮과 밤, 여름과 겨울, 과거와 미래 등 시간적 상황에 따라서 물질과 정신, 생활과 예술, 시와 반시 사이에서 무한히 순환하면서 원주를 확대해 나가려 했던 시적 모험도 중용적 다원주의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귀납과 연역, 내포와 외연, 비호(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 무한한 순환. 원주(圓周)의 확대, 곡예와 곡예의 혈투. 뮤리얼 스파크와 스푸트니크의 싸움. 릴케와 브레히트의 싸움.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 반시론의 반어.” (반시론)


이미 오래 전부터 최장집 교수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국가에 반하는 시민사회’로부터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로 특징지을 수 있는 양상”으로 변화했다고 진단하면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는 ‘민중에서 시민으로’의 변화나 다원주의적 사유가 요구된다고 강조해 왔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는 백낙청 교수가 과거 시민문학론에서 제시했던 완숙한 시민이 다시 요청된다. 지금은 독재시절에 불가피하게 형성되었던 지배계급 대 민중의 적대적 진영대립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민들 간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경쟁이 중요해진 시대이다. 과거 사월혁명 직후부터 혁명의 실패를 한탄했던 김수영의 시대나, 현재에도 촛불 이후 더욱 확고해진 기득권 양당 체제에 분노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편협한 진영주의에서 벗어난 제30지대 다원주의는 갈수록 절실해지고 있다.


이제 김수영의 문학은 단순히 소시민성을 극복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다원주의적 시민의식을 선취했다는 면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한겨레신문 필자들에게 비판받고 있는 김수영을 변호하고 나선 이유이다. 김수영 시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아니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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