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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Oct 02. 2021

돈 : 돈, 후란넬 저고리

- 김수영의 다원주의(17)

돈 : 돈, 후란넬 저고리


한겨레신문의 [거대한 100년, 김수영] (18) 돈 <구차하기에 더욱 말해야 하는 돈, ‘적’과의 동침을 택했다>에서 김행숙 교수는 김수영이 "은유도 상징도 아닌 직설로" 돈을 말하고 사유했다고 적절하게 설명한다.


행숙 교수는 전통적인 유교 의식이나 교양으로 인해 “돈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상정된 시의 영역에서는 돈의 문제에 관한 한 초월하거나 초연하거나 덮어놓는 제스처가 무의식적인 관례”였다고 본다. 


그리고 김수영이 돈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사유 것은 “시적 금기를 찢는 일, 시와 산문의 경계를 해체하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김 교수가 “김수영에게 가난은 이 세상, 이 나라의 문제이며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라고 설명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김 교수의 말대로 김수영에게 있어서 “시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 하나가 정치적인 구속이라면 다른 하나는 돈(자본)의 속박”이다.


특히 김수영에게 있어서  생활과 의 속박 문제 초기 시인 「공자의 생활난」에서부터 후기 시인 「라디오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기본 문제이다.


그런데 김 교수 “자본주의와 존재 자체로서 대립하는 부정성”에서 예술의 현대성을 찾은 아도르노와 달리 김수영은 일상을 영위하는 세속에서 예술적으로 탈주하려고 하지 않고 “적과의 동거”를 택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나, 돈에 대한 김수영의 태도를 자기기만과 연결되는 “아이러니”로 설명하는 것 동의하기 어렵다.


김 교수는 김수영이 “왜 시에다 돈 얘기를 구차하게 해댔던 걸까”라고 묻고는, “돈에 얽힌 사건과 관계와 마음이 구질구질해서, 구질구질함을 의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는 자기기만과 아이러니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구차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차하기에 쪽팔리게 말해야 하는 것”을 “김수영이 가진 시적 태도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김수영의 현대성은 은유도 상징도 아니고 아이러니까지도 아닌 그야 말로 직설적으현실 생활과 돈을 말하고 긍정했던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은 “비루하고 창피해서, 무섭고 겁이 나서, 제대로 보지 못하던 것”으로 생활과 돈을 적대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세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1963년의 시 「돈」에서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무수히 만진 돈은 그대로 나갔기 때문에 “헛만진 것”인데, 쓸 필요가 없어서 삼사일을 자신과 “침식을 같이한 돈”, 즉 여유 있게 남아 있는 돈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대견하고 흐뭇하다는 뜻이다.


그가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돈 30원으로 생긴 현실적인 생활의 여유를 긍정하 이유는 “아귀(餓鬼)” 같은 “어린놈” 때문이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린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즉 생활 세계에서 자식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이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의 비밀”이라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돈이 인간 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정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초월성만을 추구하는 시인들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돈의 가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도 읽힌다.


이미 해방 직후 「공자의 생활난」에 극심한 생활난 해결해 줄 수 있는 서양문명의 가치를 바로 보아야 한다 주장했던 것처럼 이 시에서도 인간 생활 필수적인 돈의 가치를 정시할 것을 강조하고 다.     


물론 김수영이 현실적인 생활과 돈 중시했던 것은 아니다. 이 시보다 조금 앞선 「후란넬 저고리」(1963)에서는 반대로 현실 생활 세계에서 벗어나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려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 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라고 말한다. 시작 노트에는 ‘후란넬(flannel) 저고리’가 고급 양복으로서 “노동복다운 노동복”이 못 되는 “부끄러운 노동복”인데, 이것이 자신의 “노동의 상징”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자신의 노동은 육체노동이 아니라 후란넬 저고리 같은 양복을 입고 하는 예술노동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작 노트에서 그가 고급 양복을 노동복으로 걸치고 무슨 변변한 노동을 하겠느냐고 당신들이 나를 나무랄 것이 뻔하지만, “당신들의 그러한 모든 힐난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나의 고독”이라고 항변하는 것도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고독, 즉 초월적인 예술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시에서 그가 후란넬 저고리 속의 호주머니에는 “물부리와 담배 부스러기”,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이 있지만 "돈"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생활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호주머니에 "연필쪽"과 "옛날 추억"이 들어 있지만 일년 내내 한번도 펴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인간으로서 먹고사는 생활난을 해결하느라 일 년에 시인으로서 시 한 편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는 “아무것도 집어넣어 본 일이 없는 왼쪽 안 호주머니”에 “오랜 친근한 친구”인 “휴식의 갈망”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현실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할 수 있는 휴식을 갈망하고 있다는 말이다.


김수영은 시작 노트에서 처음에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니 / 후란넬 저고리도 무겁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보니’가 ‘보면’이 되고, ‘무겁다’가 ‘무거워졌다’라는 과거로 변하고, 게다가 ‘훨씬’이라는 강조의 부사까지 붙어서 본래의 ‘이데아’인 ‘노동의 찬미’는 ‘자살의 찬미’로 화해 버렸다”라며 퇴고 과정 설명한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니 / 후란넬 저고리도 무겁다”라는 말이 노동의 찬미가 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일을 하지 않고 낮잠을 자면 가벼운 후란넬 저고리조차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 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라고 수정 말이 자살의 찬미가 되는 이유는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가벼운 후란넬 저고리에 시인으로서 갈망하던 휴식이 채워져서 무거워졌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노동의 자살', 즉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할 수 있는 휴식을 누리다는 이다.  


김수영은  「후란넬 저고리」에서 시인으로서 현실 생활 세계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정신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더니, 「돈」에서는 반대로 인간으로서 현실 세계에서 필수적인 돈을 긍정하면서 현실적인 생활에 충실하겠다는 모순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현실 생활과 돈을 적대시하면서 적과의 동침을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적 예술에 못지 않게 긍정했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은 한편으로는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현실적인 생활에도 충실하고 노력했던 시인이다.


김수영은 시인과 생활인, 돈과 휴식, 생활과 예술 모두를 긍정하면서 그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돈(1963)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삼사 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어린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 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후란넬 저고리(1963)

          

낮잠을 자고 나서 들어보면

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

거지의 누더기가 될락 말락 한

저놈은 어제 비를 맞았다

저놈은 나의 노동의 상징

호주머니 속의 소눈깔만한 호주머니에 들은

물뿌리와 담배 부스러기의 오랜 친근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들은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

그러나 돈은 없다

-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다

-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나 나의 호주머니에는?

연필쪽!

옛날 추억이 들은 그러나 일년 내내 한번도 펴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

아무것도 집어넣어본 일이 없는 왼쪽 안호주머니

- 여기에는 혹시 휴식의 갈망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친근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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