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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Oct 23. 2021

페미니즘 : 죄와 벌, 여자, 이혼 취소 , 성

- 김수영의 다원주의(18)

페미니즘 : 죄와 벌, 여자, 이혼 취소, 성


올해는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겨레신문은 지난 5월 24일부터 11월 22일까지 6개월에 걸친 ‘거대한 100년, 김수영’ 연재를 모두 마쳤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김수영 시인의 삶과 문학을 돌아보고 그의 문학이 지니는 의미를 새겨 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취지가 무색하게도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고문들은 김수영 시인을 찌질한 소시민이라느니 여성을 혐오하는 태도를 보인 시인이라는 모욕 수준의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요즘 시대에 페미도 아니면 뭐해?>(2019)라는 책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위해 노력해 온 “시니어 페미니스트” 노혜경 시인은 (21) 여혐 <고난을 함께하는 동지, 아내여 화해하자>에서 김수영의 여성 혐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여편네 타령을 하고 시의 도처에서 여성을 불러내는 시인. 김수영의 의식적 시인이 정치적 시대에 감응하고 자유와 혁명을 꿈꾸었다면 무의식적 시인은 유구한 문학적 ‘미소지니’의 전통을 넘어 현실 아내를 욕하고 때려눕히면서 시의 세계로 함께 들어왔다.”

“여편네는 고립된 삶을 살던 그가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였던 것이다. 이 독특한 타자성의 경험이 김수영에게 여성혐오를(동시에 자기혐오를)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준 것 같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한 채로 중단되었다. 김수영은 ‘도중’에 죽었다.”

“다행히 그는 죽기 전에 아내를 경유하여 여성이라는 존재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 죽음 반 사랑 반의 존재라는 통찰을 남겼다. 당대의 어떤 시인 소설가보다 훨씬 집요하게 ‘여편네’를 탐구한 덕분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힌 폭력가장이고 지일에는 창녀를 사는 속물이라는 평가를 김수영이 피해갈 수는 없다. 60년대를 짊어지고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다.”


노혜경 시인은 김수영이 여혐 시인이라는 증거로 먼저 「죄와 벌」(1963)을 든다. 물론 노 시인은 단순히 여혐이 아니라, “존재의 갱신”이라는 종교적 목표와 연결된다고 변호하기도 한다. “살인할 용기의 부족 또는 부재. 라스콜니코프의 살인과 겹쳐 읽을 때 살인은 존재의 갱신이라는 종교적 목표와 이어진다. 수영은 그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자신을 혐오한다고 읽을 수도 있다.”


여기서 김수영이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 눕히는 행위는 여편네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시인은 이 작품이 여혐을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시”라고 비판하면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 시 때문에 많은 여성 독자들이 더 이상 김수영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며 못을 박는다.


하지만 이 시에서 여편네는 다른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 시인의 아내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상징한다. 이 시는 초월적인 예술과 현실적인 생활 사이의 긴장이라는 김수영의 시의 핵심 주제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지 여성 혐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김수영의 시에 대한 대부분의 오해와 곡해는 그의 시를 과도하게 리얼리즘의 관점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김수영은 리얼리스트인 것 못지 않게 작품 속에 상징의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은 모더니스트인데도 말이다.


그는 시의 첫머리에서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라는 무서운 말을 던진다. 타인을 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살인의 대상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아내인 “여편네”를 선택한다. 더구나 아내를 때려눕혔을 때, “어린놈”이 울고, “취객”들이 모여들고, “아는 사람”이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지만 걱정한다.


심지어 그는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 무엇보다 아까웠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아내를 죽이고도 사이코패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고 자신의 범행을 감추려고만 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종이 우산을 아까워하는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초인 사상에 빠져 페테르부르크의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고 나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과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러니 이 시를 범죄 현장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으로 이해하면, 여기서 “죄는 살인에까지 이르는 자기 동일성의 확장이나 초월이 아니라 졸렬하기 짝이 없는 아내 구타고, 그래서 벌은 희생을 통한 속죄와 구원의 도정으로 그를 이끌지 못하는 졸렬함”이라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여편네”를 실제 아내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는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여편네를 때려눕히는 행위는 실제 살인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여편네로 상징되는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부정하고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돈을 벌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편네를 때려눕히는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현실 생활과 돈을 부정하자마자 제일 먼저 울고 있는 죄없는 “어린놈”이 마음에 걸리고, “아는 사람”들이 무책임한 가장이라고 비난할까 걱정된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고 초월적인 예술만 추구하는 것은 죄없는 자식과 타인의 시선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의 첫머리에 있는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라는 말도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부정함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는 이런 희생을 감당할 만한 각오가 충분해야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자식들의 희생과 가장으로서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생활과 돈에서 자유로운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가 가장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라고 마무리하는 것도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지우산으로 상징되는 물질적 욕망 때문에 어렵다는 뜻으로 읽힌다.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려면 자식의 희생이나 타인의 시선보다 먼저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죽여야 하는데,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무리 시인이라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물질적 욕망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이 작품을 상징적인 관점에서 보면,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겠다고 현실 생활과 돈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아내를 때려눕히고 자식들을 방치하는 죄를 저지르는 일과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부정하고 초월적인 예술만을 추구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벌”을 받을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초월적인 예술만을 추구하면서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무책임한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시는 아내 구타와 살해에 대한 사이코패스적 자백이나 여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여편네로 상징되는 생활과 돈을 긍정하면서, 시인이라도 현실적인 생활과 돈을 부정하고 초월적인 예술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적인 예술관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노혜경 시인은 김수영 문학에서는 아내가 일종의 악역을 맡고 있다고 하면서, 그에게 여편네는 독립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분신”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여자」(1963)에서 김수영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여자가 에고이스트, 즉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 독립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었다고 본다.


노 시인은 김수영의 근대를 향한 모험은 “그의 아내/여편네라는 타자를 빌려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내보내고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미적 근대성의 담지자로서 어떤 시인도 여성혐오를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이토록 명료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여성혐오를 넘어 여성과 평등해졌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 혐오가 이렇게 쉽게 여성과의 평등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시 「여자」에서의 여자도 실제의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편네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야 은폐된 의미를 제대로 찾아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여자를 “집중된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마의 힘줄”이 “설움”을 가르쳐 준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전쟁 중에 그것도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여자로 상징되는 현실 생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는 초월적인 예술과 정신보다는 현실적인 생활과 생존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가 “전쟁”에 축복을 드렸다고 말하는 것도 현실적인 생활을 부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생존을 위해 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전쟁의 고난 속에서 배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인간이 현실적인 생활과 생존을 위해 온 힘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 깨달았다는 말이다.


반면에 그는 지금 “6학년 아이들의 과외공부집에서 만난 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에게서 “여자의 감각”, 즉 현실 생활과 돈에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본다. 그리고 생활과 돈의 포로가 되어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에고이스트(egoist)”를 “죄”로 규정한다.


전쟁처럼 생존이 문제가 되는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일상적인 상황에서 이기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어 현실 생활과 돈에만 집중하는 것은 범죄라는 뜻이다. 그가 “속죄”에 축복을 드렸다는 말도 현실적인 생활과 돈의 포로가 되지 않고, 시인으로서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로 이해된다.


여기서 그는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지닌 존재”나 “독립한 개인”인 여자를 통해 “단독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상징되는 현실적인 생활과 돈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시인이 되겠다는 예술적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노혜경 시인은 시와 산문 속에서 김수영의 아내에 대한 인식이 이후에 변화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이혼취소」(1966)에서 빚보증을 선 일을 해결하고자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면서 아내의 속됨이 생활을 위해 피 흘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해를 청한다고 하면서, 오랜 “적”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김수영은 실제적인 아내를 적으로 삼거나 혐오한 시를 쓴 적이 없다. 그래서 아내와 실제로 화해했다는 해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아내와 이혼한다는 말은 실제의 아내와 법적인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아내로 상징되는 현실 생활과 돈으로부터 벗어나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겠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이혼을 취소한다는 것도 실제 아내와의 법적인 이혼 절차를 취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시인이지만 아내로 상징되는 현실 생활의 가치를 긍정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쓰겠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그는 아내가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에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친구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 주기로 한 것”, “집문서를 넣어 6부 이자로 10만 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좋다고 말한다. 아내는 생활능력도 없으면서 친구 미망인의 보증을 섰던 자신을 나무라면서 이혼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 생활과 돈만 추구하는 아내와 이혼하고, 불쌍한 친구 미망인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좋아한다.


그런데 막상 10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을 물어주려다 보니까 6부 이자를 아껴 보려고 아내보다도 더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5만 원을 무이자로” 바꿔 보려고 “생전 처음으로 돈 가진 친구한테 정식으로 돈을 꾸러” 간다.


그는 “피를 안 흘리려고” “저것을 하고 이짓을 하고 저짓을 하고 / 이것을 하고” 있는 자신을 한탄한다. 평소에 돈보다 친구와의 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피 같은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애쓰면서 돈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그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 「지옥의 격언」에 나오는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라는 말을 소개한다.


이것은 “실행되지 않는 욕망을 키우느니 요람에 든 아기를 죽이는 편이 낫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같은 글에 나오는 “욕망할 뿐 행하지 않으면 질병이 생긴다.(He who desires but acts not, breeds pestilence)”라는 말로 뒷받침 된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이 말을 “상대방(미망인)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로 의역했다고 시의 각주에 밝힌다. 욕망을 전적으로 긍정하라는 블레이크의 말을 현실적인 욕망의 세계가 초월적인 선의 입구라는 의미로 바꿔 놓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그는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자신도 아내처럼 현실 생활에서 필수적인 피 같은 돈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래서 그는 현실 생활과 돈을 부정하는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특히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 그 눈동자는 피를 흘고 있지 않다”라고 비판한다. 현실 생활과 돈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천사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속물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작가들, 현실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순수 문학만 내세우는 작가들의 위선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의 지대와 달리 인간의 지대에는 선과 악의 중립이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천사처럼 현실 생활과 피 같은 돈을 부정하는 것이나, 현실 생활에 빠져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계인 현실 생활과 선의 세계인 초월적인 예술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 이혼을 취소하자”라고 제안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이혼을 취소하자는 말은 아내로 상징되는 현실 생활을 초월하려 했던 그가 블레이크 시를 통해 현실 생활을 긍정하기로 결정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제는 자신도 초월적인 예술만 추구지 않고, 현실 생활 속에서 피처럼 소중한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욕망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선은 아니지만, 선을 이루기 위한 입구이자 전제 조건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선을 이루기 위한 출구는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예술 세계일 것이다. 이 시에서 그는 현실적인 아내와의 실제 이혼을 취소하겠다는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실 생활 속에서 피처럼 소중한 돈이 선을 이루는 입구이자 전제 조건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벌」이나 「이혼취소」처럼 여편네와 아내로 상징되는 현실 생활과 돈을 긍정하려고 애썼던 시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시인으로서 「여자」에서처럼 여자로 상징되는 생활과 돈의 포로가 되지 않고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애썼던 시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는 그의 다원적인 태도는 「성」(1968)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이 시에서 그는 “그것”과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이 “섹스”를 “개관(槪觀)”, 즉 대충 살펴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여편네는 그의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생활을 상징하고, ‘그것’은 이와 대립되는 초월적인 예술을 상징한다. 그것, 즉 초월적 예술을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열렬히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여편네, 즉 현실적 생활을 위해 “어지간히 다부지게” 노력해도 생활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시인으로서 초월적 예술을 추구하다 보니 현실 속에서 생활난을 겪고 있다는 상징적인 고백이다.


그는 가난한 생활이 섬찍해서 이전의 “둔감한” 생활인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황홀(恍惚)의 순간”이지만, 현실적인 생활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여편네로 상징되는 돈을 벌기 위해 속아 사는 불쌍한 “연민(憐憫)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비록 속아서 사는 연민의 순간일지라도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육체를 지닌 인간의 운명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그는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고 하면서 돈을 버는 일에 더욱 철저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것’과 바람을 피우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조강지처인 ‘여편네’를 다시 사랑하는 것처럼 이제는 초월적 예술을 추구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현실적 생활에 전념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의 여편네는 “자본주의적 일상과 속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시적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민낯을 명증하게 대면하게 하는 부정적 계기”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긍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자 연민의 대상인 현실적인 생활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가 초월적 예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현실적 생활과 돈만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초월적 예술을 추구하는 것을 “황홀(恍惚)의 순간”이라고 긍정하는 반면에 현실적 생활을 위해 사는 것을 “연민(憐憫)의 순간”이라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그가 마무리 부분에서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 생활만 지독하게 추구하다 보면 초월적 예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에게 던지는 뜻으로 읽힌다. 그는 현실적 생활과 초월적 예술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혜경 시인은 고립된 삶을 살던 김수영이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가 여편네였다고 본다. 그리고 다행히 그가 죽기 전에 아내를 경유하여 여성이라는 존재가 “죽음 반 사랑 반의 존재”라는 통찰을 남겼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힌 폭력 가장이고 지일에는 창녀를 사는 속물이라는 평가를 김수영이 피해갈 수는 없다. 60년대를 짊어지고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고 혹평한다. 아무리 변호해 주려고 해도 김수영이 여혐 시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반시론」에서 현실 생활의 “탈출구”로서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먹듯이 창녀를 찾아간다고 말하는 것도 시인들이 원고를 수정 당하면서 “순결”을 잃는 민족적 문제보다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순결”을 잃고 살아야 하는 인간적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가 계집보다도 새벽의 산책이 몇백 배나 더 좋다거나, 한적한 새벽 거리에서 잠시나마 “이방인의 자유”의 감각을 맛본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머리가 훨씬 단순해지고 성스러워지기까지도 한다고 밝히는 것도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생활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가 등굣길에 나온 여학생 아이들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격의 없이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 때묻지 않은 순간, 가식 없는 순간”(507)이라고 말하는 것도 생존을 위해 순결을 팔아야 하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바로 보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수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거리의 여자’들에 주목해 왔다. 1950년대의 일기에서는 이들을 “규방에서의 인생 최대의 쾌락과 행복까지도 빼앗긴 사람들”(700)이라고 하면서, “도회의 기름 위에 떠 있는 여자”, “결론이 없는 여자들”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현대의 비밀”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의 시 「거리2」에서도 “돈을 버는 거리의 부인”인 창녀에게 “잠시 눈살을 펴고 / 눈에서는 毒氣를 빼고 / 自由로운 姿勢를 취해 보아라”라고 주문하면서, 생존을 위해 여성마저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극복하고 인간적인 자유와 “거리의 생명(生命)”을 다시 회복할 것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반시론」에서 이런 휴식의 기회도 요즘에 와서는 놀라울 정도로 이용하는 도수가 적어졌다고 하면서, 이를 “생활이 안정된 탓”(507)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 둔해지지만 이조차도 “무한대로” 좋다고 하면서 생활의 안정과 여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창녀를 사는 것은 “자본주의시대 성 통치술에 반항하는 행위”나 “기성의 부르주아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실천으로서의 “초현실주의적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비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창녀를 통해「라디오 界」에서 제시했던 현실적인 생활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적 행위라는 해석이다. 


단언컨대 김수영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여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인이 아니다. 그는 아내, 여편네, 여자 등을 현실적인 생활과 돈의 상징으로 만들어낸 상징주의적인 시인이다. 이것도 여성 일반에 대한 성적인 규정이 아니라, 자신이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시인이기 때문에 아내를 현실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생활인으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


더구나 김수영은 여성으로 상징되는 생활과 돈을 혐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내처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로 긍정했다. 김수영은 여성(생활)을 혐오한 시인이 아니라, 반대로 여성(생활)을 긍정한 시인이다.


그는 초월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생활도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적인 시인이다. 그런데도 상징적인 의미를 천착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 있는 표면적 의미에만 집착해서 여혐 시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거나 곡해가 아닐 수 없다.


당대 누구보다 현대성을 강조했던 모더니스트 시인을 여혐 시인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를 빨갱이나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공격이자 인격 살인에 가까운 일이다. 김수영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지상 논쟁을 요구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이 일반인들에게는 여혐으로 오해받을 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꽉 차 있는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해 주어야 할 문학인들조차 표면적인 의미에 집착해서 여혐 시인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일부 문학인들의 자의적인 해석과 낙인 찍기이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편승해서 수많은 국민들이 사랑하고, 문학계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인정받는 시인을 여혐 시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냥 침묵할 수 없는 일이다.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언젠가부터 그에게 덧씌워진 여혐 시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길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연구자 자신의 작고 좁은 진영의 눈으로 김수영을 여혐 시인으로 쉽게 단죄하지 말고, 그가 심어 놓은 울창한 상징의 숲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다양하게 펼쳐진 희미한 길들을 다시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


앞으로 노혜경 시인을 비롯해서 김수영을 여혐 시인이라고 확신하시는 문학인들이 있다면, 이 글에 대해 재반박을 하거나, 아니면 상징성을 고려하지 못한 기존 해석의 오류를 바로 잡고 여혐 시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워 주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세계적인 문학적 유산인 김수영 시인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죄와 벌(1963)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함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여자(1963)     

     

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

그 이마의 힘줄같이 나에게 설움을 가르쳐준다

전란도 서러웠지만

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

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

고난이 나를 집중시켰고

이런 집중이 여자의 선천적인 집중도와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쟁에 축복을 드렸다     


내가 지금 6학년 아이들의 과외공부집에서 만난

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에게 느낀 여자의 감각

그 이마의 힘줄

그 힘줄의 집중도

이것은 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본성은 에고이스트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

그러니까 뱀은 선천적인 포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속죄에 축복을 드렸다


이혼 취소(1966)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어 6부 이자로 10만 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10만 원 중에서 5만 원만 줄까 3만 원만 줄까

하고 망설였지 당신보다도 내가 더 망설였지

5만 원을 무이자로 돌려보려고

피를 안 흘리려고 생전 처음으로 돈 가진 친구한테

정식으로 돈을 꾸러 가서 안 됐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이것을

하고 피를 안 흘리려고

피를 흘리되 조금 쉽게 흘리려고

저것을 하고 이짓을 하고 저짓을 하고

이것을 하고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나이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지

그 편지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를 감동을 하고

읽었지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地帶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성(性)(1968)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이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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