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방법 및 서술 순서
본 연구에서는 김수영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개별적인 시 작품에 대해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을 기본적인 연구 방법으로 삼고자 한다. 개별적인 시 작품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내놓는 작가론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찍이 황동규는 “궁극적인 김수영의 재구성은 이런 식의 작품의 분석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재구성된, 따라서 구체화된 정신은 개개의 작품에 또 새로운 빛”을 던져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연호의 말대로 “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해와 깊이 있는 분석이 선행되지 않는 논의의 재생산은 자칫 문학 외적인 신비화, 신화화만을 부채질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김수영의 거의 모든 시 텍스트에 대해 전체적인 해석을 시도한 단행본들이 출판되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본 연구에서는 특정 철학적 내용과의 연관성을 미리 가정해 놓고 관련된 일부 단어나 구절들을 아전인수식으로 끌어오는 기존의 연구방식에서 탈피해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전체적이고 세밀한 해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그동안 김수영의 시를 특정 철학자와 연결지어 분석하거나, 아예 철학자들이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철학적 의미를 분석한 연구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연구 분야의 경계를 넘어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 연구를 철학이나 심리학 분야에 종속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본 연구에서는 의미와 무의미, 내적 분석과 외적 분석을 모두 활용하는 다원주의적 방법으로 개별 시 작품을 분석하고자 한다. 김수영의 시는 어떤 장면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사실적인 시거나 반대로 의미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무의미 시 또는 불가해한 시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인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김수영의 시가 1960년 사월혁명을 기점으로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그의 전기 시를 난해시로 규정하고 쉽게 해명되지 않는 부분들은 건너뛰면서 “특정 문맥”에서 “특정 주제”를 추출해 내는 데에 그치거나, 후기 시를 사실적인 고백으로 간주하고 표면적인 의미에만 집착해서 ‘여성 혐오’나 ‘소시민’이라는 과도한 비판을 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김수영은 1966년의 산문「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에서 김춘수의 무의미 시를 비판하면서, “의미를 포기하는 것이 무의미의 추구도 되겠지만,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그 ‘의미’를 구제함으로써 무의미에 도달하는 길”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미를 배제한 시가 아니라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충동이 서로 강렬하게 충돌”(3판:461)하는 다원적인 시를 추구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그의 전기 시와 후기 시 모두 의미와 무의미, 외연과 내포,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는 다원적인 시로 간주하면서, 무의미 속에 감춰져 있는 의미를 면밀하게 탐색해 볼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김수영의 시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도 언어적 텍스트 자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내적 분석과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전기적 사실 등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외적 분석 등을 모두 활용하는 다원주의적 방법론을 따르고자 한다. 파스칼 카자노바도 “텍스트가 갖는 의미의 근원을 텍스트 자체에서만 찾아내는” 내적 비평과 “텍스트 생산의 역사적 조건을” 묘사하는 외적 비평 사이의 이율배반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텍스트에 관한 전형적으로 문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국제문학 비평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세계문학 공간은 역사로서, 그리고 지리로서 윤곽과 경계가 결코 그려지지도 묘사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작가 자신 속에서 구현된다. 즉 작가가 문학사이고 문학사를 형성한다. 따라서 국제문학 비평의 야망은 텍스트에 관한 전형적으로 문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가 갖는 의미의 근원을 텍스트 자체에서만 찾아내는 내적 비평과 텍스트 생산의 역사적 조건을 묘사하나 문학 연구자들로부터 텍스트의 문학성과 특이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언제나 비난받는 외적 비평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율배반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를 이를테면 공간화된 역사인 이 광활한 공간 안에 위치시키는 데 이르는 것이게 된다.
김진엽이 제시한 다원주의 미학도 내적 분석과 외적 분석 사이의 이율배반을 해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비평을 해석과 연관하여 의도주의, 형식주의, 후기 구조주의로 구분했다. 먼저, 의도주의는 저자의 전기적 사실이나 작품의 사회적 배경 등을 통해 “저자의 의도”를 추측해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자신의 의도를 밝히지 않는 이상 결국 감상자의 주관적 추측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다. 외적 분석은 의도주의처럼 “객관성의 결여”라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내적 분석에 속하는 러시아 형식주의나 미국 신비평은 “작품 자체의 형식적 구조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보는 해석 방법으로서 “작품의 자율적 본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 외부인 저자나 독자가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텍스트 자체에 있으므로 “상호 작용하는 단어들이 언어의 규범에 의해서 결정됨으로써 나타나는” 의미와 텍스트의 “형식적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기 구조주의 비평가인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 통해 의도주의를 해체했고, 데리다가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 형식주의를 해체했다고 하면서, 이제는 한 가지 비평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더 많은 비평의 방법을 개발하는 다원주의 비평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김수영의 시 작품을 그의 산문과 긴밀하게 연결해서 해석하는 외적 분석을 활용할 것이다. 일찍이 김인환은 문학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한 시인의 전 작품을 하나의 작품처럼 상호 연관지어 분석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작품 전체에 내재하는 비밀의 건축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시뿐 아니라 산문도 자세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동규도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성질상 같은 장에 놓여 있으므로 “김수영은 산문 이해를 배제한 시의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낙청도 “진정한 작가의 경우 그가 쓴 것 전부가 한 개의 텍스트를 이룬다는 T.S. 엘리어트의 말이 해당될 수 있는 많지 않은 한국시인 중의 하나가 김수영”이라고 하면서, “시 따로 시론 따로, 거기다 생활은 또 생활대로 따로 도는 그런 시론이 아니고, 그 자신의 삶과 시 전부를 한 지성인으로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정리해 나간 자취”라고 평가했다.
특히 유종호는 김수영의 산문이 “이상 이래의 일품이요 상쾌한 정신의 환기장치”라고 극찬하면서, 김수영의 산문은 시와 더불어 꼭 있어야 할 “시간과 공간의 필연”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그의 시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자가 해설”이 되어 준다고 보았다. 김수영은 언제나 산문을 통해 그의 시 의식을 해명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적극적으로 설파한 측면이 강하고, 또 “완성도 높은 산문”들을 많이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수영의 산문 가운데에는 사실상 특정 시 작품에 대한 시작 노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함께 본 연구에서는 김수영의 시 텍스트 자체의 내적 구조와 의미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내적 분석을 기본적인 연구 방법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시 텍스트에 나타난 세계시민주의적 긴장의 양상, 긴장의 해법으로서 중용적 다원주의, 중용의 실천 방법으로서 시공간의 순환을 중심으로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가 개별적 가족만을 추구하는 소시민 문학이 아니라, 세계시민주의 논의의 핵심인 민족과 세계, 가족과 인간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 ‘다원주의’는 헤겔의 변증법을 일원론적 절대주의라고 비판하는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주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제임스는 1909년에 출간한 『다원주의자의 우주』에서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를 총체적인 “전체-형식(all-form)”을 유일한 것으로 믿는 일원론적 절대주의와 달리, 전체 형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분산적인 “개별-형식(each-form)”만이 논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고 경험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절대주의는 방금 전술된 실체가 총체성의 형식에서만 충분히 신적이 되고, 전체-형식(all-form)이 아닌 어떤 형식에도 진정한 그 자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내가 선호해 마지않는 다원주의적 관점은 궁극적으로 결코 전체 형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꺼이 믿는다. 즉 실재(reality)의 실체성(substance)은 결코 한꺼번에 집결될 수 없고, 어떤 것들은 세워진 최대의 통합체의 외부에 남겨지게 마련이고, 그리하여 실재의 분산적 형식, 즉 개별-형식(each-form)만이 논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으며, 경험적으로도 그것은 명백하게 자명한 것으로 흔히 인정되는 전체 형식에 못지않은 개연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제임스는 절대주의적 일원론이 무시간적인 영원성이나 무한성을 강조하지만, “모든 목적, 이유, 동기, 욕구나 혐오의 대상,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나 기쁨의 근거는 유한한 잡동사니들의 세계 안에 들어 있다고 보는 다원주의”가 인간의 현실 세계에 부합되는 관점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다원주의는 내적으로 일관적인 범주들을 “모든”과 “무(無)”라고 믿고 있는 일원론과 달리, “세계의 각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 다른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그 방식들은 구별될 수 있다.”라고 보는 분산적인 관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다원주의적 세계를 “제국”이나 “왕국”이 아니라 “연방공화국”이라고 설명했다. 다원주의는 세계가 서로 “함께” 공존하지만, 어떤 것도 모든 것을 포함한다거나 모든 것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인가 늘 빠져나가고, 뭔가 다른 여분이 늘 남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광대하거나 포괄적이라 해도, 다원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모종의 또는 어떤 정도로 진정한 의미의 ‘외부’ 환경을 갖는다. 사물들은 많은 방식으로 서로 ‘함께’ 공존하지만, 어떤 것도 모든 것을 포함한다거나 모든 것 위에 군림하거나 하지 않는다. 항상 ‘그리고’라는 낱말이 모든 문장 뒤에 따라붙는다. 무엇인가 늘 빠져나간다. ‘결코 완벽한 것은 없다.’는 말은 우주의 어느 곳에서든지 전체-포괄성을 추구하는 최선의 시도들에 대해 표명되어야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원주의 세계는 제국이나 왕국이라기보다 연방공화국에 더 가깝다."
제임스는 직접적인 연결 상태로 통합되어 있는 일원론적 ‘전체-형식’의 세계인 ‘유니버스(universe)’와 달리, 개별적인 것들이 연속해 있는 다원주의적 ‘개체-형식’의 세계를 ‘멀티버스(multiverse)’라고 불렀다. 일원론은 통일적인 ‘전체-형식’만이 합리적인 유일한 형식이라고 간주하는 “전체-통일”, “통합” 유형이지만, 다원주의는 사물들이 분산적인 ‘개체-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연합”, “연결”, “연속적” 유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의 다원주의는 대립적인 A와 B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이분법(A/B)이나, 정(A)과 반(B)의 투쟁을 통해 고차원적 합(C)으로 발전하는 헤겔의 변증법(A↔B⇒C)과 달리, 연방공화국처럼 각각의 독자성을 긍정하고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다양하게 연결되는 연속적 체계(A↔B)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멀티버스’는 여전히 하나의 ‘유니버스’로 남아 있다. 모든 부분에서, 그러한 우주는 실제적이거나 직접적인 연결 상태에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이 인접하는 이웃들과 불가분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모든 부분과도 가능한 연결이거나 직접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의 연합 유형은 일원론적 전체-통일 유형과는 다르다. 그것은 보편적인 상호-함축 또는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있는 통합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동조(同調)적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 즉 연속이나 인접 또는 접합(接合)을 이루는 연결 유형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어를 선호한다면, 그것을 연속적(synechistic) 유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주의는 이후 샹탈 무페의 ‘경합적 다원주의’로 이어진다. 샹탈 무페는 “변증법적으로 종합될 수 없는” 양극 사이에서 민주적으로 “경합”하는 “경합적 다원주의”를 제시했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은 갈등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에 있으므로, 근절할 수 없는 긴장과 갈등 상황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구성할 수 있으려면, 타자를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적(敵)”들 사이의 쟁투가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격렬하게 다툴지라도 자신의 이념을 옹호할 그들의 권리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대결자”들이 스포츠처럼 공정하게 경쟁하는 “경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결자란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 원칙에 대한 공통의 헌신을 공유하는 대립 진영”이다. 무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헤게모니적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 맞서지만, 자신들의 대립 진영이 그 입장의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리의 정당성”을 문제 삼지 않는 대결자들 간의 “경합적 투쟁”이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성은 정확히 갈등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에 있으므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를 괴멸시켜야 하는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격력하게 다툴지라도 자신의 이념을 옹호할 그들의 권리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대결자로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중요한 것은 갈등이 ‘적대’(적들 사이의 쟁투)의 형태가 아니라 ‘경합’(대결자들 사이의 쟁투)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경합적 관점에서 민주주의 정치의 중심 범주는 ‘대결자’라는 범주이다. 즉,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 원칙에 대한 공통의 헌신은 공유하는 대립 진영 말이다. 대결자들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헤게모니적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 맞서지만, 자신들의 대립 진영이 그 입장의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리의 정당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대결자들 사이의 이런 대결이 바로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조건인 ‘경합적 투쟁’을 구성하는 것이다."
한편, 본 연구에서 ‘다원적 세계문학’은 파스칼 카자노바의 ‘세계문학공화국’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파스칼 카자노바가 “문학의 드넓은 나라”, “문학예술의 고안에 특유한 수단과 방법이 논의되는 세계”로 규정했던 ‘세계문학공화국’은 개별적 민족 전통문학과 보편적 세계문학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과 경합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카자노바는 단일한 세계문학공화국에서 “초국가적 경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통된 척도”로서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 또는 “문학의 시간”을 제시했다. 카자노바가 말하는 “문학의 그리치니 자오선”은 “문학의 현재를 규정하는 규준에 대한 시간적 간격에 따라 중심과의 거리를 측정”함으로써 작품의 “현대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경합 속에서 경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학 공간의 단일화는 시간에 대한 공통된 척도의 확립을 전제한다. 저마다 절대적인 기준점, 측정에 필요한 표준을 두말없이 곧바로 인정한다. 그것은 경합자조차 자신의 경합 자체에 걸쳐 중심으로 받드는 데 동의하는 모든 중심의 중심, 공간에 설정할 수 있는 어떤 장소이자 문학에 고유한 시간이 측정되는 출발점이다. […] '문학의 그리치니 자오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에 힘입어 문학 공간에 속하는 모든 이가 중심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산정할 수 있다. 또한 미적 거리가 시간의 견지에서 측정될 수 있다. 즉 그리니치 자오선은 현재를, 다시 말해서 문학 창조의 영역에서 현대성을 설정한다."
물론 카자노바도 세계문학공화국이 “자유와 평등 속에서 실현되는”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문학 분야의 수도와 수도에 의존하고 수도에 대한 미적 거리로 규정되는 지방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구성”되어 있는 불평등 구조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세계문학사는 “문학을 쟁점으로 갖고 거부, 선언, 실력행사, 특수한 혁명, 노선 전환, 문학운동에 힘입어 세계문학을 형성한 경쟁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세계문학공화국은 수도와 지방 간에 문학적 현대성을 둘러싼 국제적 경합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이므로 “위계와 일방적 지배 관계가 영원히 고정된 불변의 구조”가 아니라, 세력 관계를 변화시키고 위계를 뒤엎을 수도 있는 “문학 혁명의 장소”라는 것이다.
"문학 공간은 위계와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영원히 고정된 불변의 구조가 아니다. 문학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로 인해 지속적인 지배 형태가 유발될지라도 끊임없는 투쟁, 권위와 정당성에 대한 이의제기, 거역, 불복종, 그리고 심지어는 세력 관계를 변화시키고 위계를 뒤엎기에 이르는 문학 혁명의 장소가 있다. 이 점에서 유일한 실제적 문학사는 특수한 반란, 실력 행사, 선언, 형식 및 언어 창안의 역사이자 문학의 질서를 뒤흔들어 문학과 문학 영역을 점차로 “만드는” 온갖 전복의 역사이다."
특히 카자노바는 개별 민족문학 공간 내부에서는 “지배적인 문학 공간에서 애초의 모든 차이를 희석하고 삭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통합·동화와 “민족의 요구에 따른 차이에 대한 표명”인 분화·이화 사이의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세계문학공화국에서 지방에 속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차이”를 확언하면서 “국제문학 영역에서 전혀 또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민족 작가의 힘겹고 불확실한 길”을 자신에게 선고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차이를 부인하면서 자신이 속한 곳을 배신하고 “주요한 문학적 중심들 가운데 하나에 동화”되거나 하는 “이율배반” 앞에서 불가피하고 괴로운 선택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1961년의 「시작 노트」에서 “멋진 세계의 촌부(村夫)”가 되는 것을 당면한 시적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4‧19를 분수령”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국내적인 제 사건이 이미 충분히 “세계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시의 제재만 하더라도 “세계적이거나 우주적인 것”을 탐내지 않아도 될 듯하다고 진단하면서, “어떻게 하면 멋진 세계의 촌부(村夫)가 되는가” 하는 문제를 당면한 문학적 과제로 제시했다.(3판:529)
그가 말한 “세계의 촌부”는 세계문학을 추구하는 “세계인”과 민족문학을 추구하는 “촌부(村夫)”가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이율배반” 속에서 공존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시민이라는 이중적 소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촌부”로서의 개별적 민족 전통문학과 “멋진 세계”로서의 보편적 세계문학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자신의 시적 과제로 삼았다는 유력한 근거로 된다.
그는 여러 산문에서 한국문학이 후진성을 탈피하고 인류의 복지와 세계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세계문학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1960년 6월 17일자 일기에서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현대에 있어서 혁명을 방조 혹은 동조하는 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혁명을 절대적 완전에까지 승화시키는 혹은 승화시켜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3판:714)라고 썼다. 그리고 「독자의 불신임」(1960)에서도 “젊은 독자들일수록 아무리 거센 호흡 속에서도 영혼의 개발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뜻에서 문학인들은 젊은 독자들의 다급한 영혼의 돌진 속에서 호흡을 꺾이거나 휴식하지 말아야 하겠다. 문학 혁명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필자의 입장에서도 먼 장래의 태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3판:240)라고 강조했다. 그는 물질문명 시대 인간적 영혼의 개발을 위한 “문학 혁명”을 직접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는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1960)에서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얼마나 뒤떨어졌는가. 학문이고 문학이고 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벅찬 물질 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3판:235)라고 말했다. 이후 「저 하늘 열릴 때-김병욱 형에게」(1961)에서도 “정신상의 자주독립인 통일 이후의 시”는 “세계적인 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시”, “좀 더 가라앉고 좀 더 힘차고 좀 더 신경질적이 아니고 좀 더 인생의 중추에 가깝고 좀 더 생의 희열에 가득 찬” “시다운 시”가 될 것이고, “시인다운 시인”이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3판:246)
이후 「모기와 개미」(1966)에서도 “우리나라는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인이 가물에 콩 나기만큼 있기 때문에 문학가가 아직도 사회적인 멸시를 받고, 그나마 여론을 조성하는 자리에서는 대학교수보다도 볼품이 없고, 우리의 시와 소설은 아직껏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3판:151)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1966년)에서도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운명에 적극 관심을 가진,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시 정신의 새로운 육성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청하는 “시인다운 시인”(3판:262)으로 제시했다. 그에게 현대 시인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보편적 세계시민이었던 것이다.
김수영은 “모든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보편적 조국, 국가의 보통법을 거슬러 조직되는 문학의 왕국, 예술과 문학이 유일하게 명령하는 초국가적 장소”인 세계문학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애쓴 국제적 작가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가 현대 시인을 세계시민으로 규정했던 것은 카자노바의 말대로 당시 세계문학공화국의 지방이었던 독일의 괴테가 “문학의 국제적 성격”을 이해하고, 세계적인 문학적 경합 공간 속으로 새로 들어와서 “프랑스의 지적 및 문학적 패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일이다.
"독일이 국제문학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시기에 ‘세계문학’의 개념이 괴테에 의해 고안되었다. 게임 속으로 새로 들어와서 프랑스의 지적 및 문화적 패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괴테는 모든 새내기가 공통으로 지니는 그 명석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들어가는 공간의 현실에 날카로운 관심을 내보였다. 그 영역에서 지배받는 사람으로서 문학의 국제적 성격, 다시 말해서 국경 밖으로 문학이 전개된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문학의 경합적 본질과 이로부터 나오는 역설적인 단일성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렇다고 김수영이 전적으로 보편적 세계문학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61년의 시 「4·19시」에서 “세계정부 이상이 / 따분해 그러나”라고 하면서, 서구 중심의 보편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도 초강대국 아래에 통합된 “세계 왕국”이 아니라, 국가 간 “경쟁 속에서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다원적 세계시민주의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국제법의 이념은 독립해 있는 많은 이웃 국가들의 분립을 전제로 한다. 비록 이런 상태 자체가 이미 전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이 상태는 이성의 이념에서 보면, 다른 국가들을 압도해서 한 세계 왕국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초강대국 아래로 여러 국가들이 통합되는 것보다는 더 낫다. […] 평화는 저 전제주의처럼 모든 힘들의 약화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들의 활기찬 경쟁 속에서의 균형에 의해 초래되고 보증되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후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1964)에서도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3판:576)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1968년의 「반시론」에서는 남북통일을 참여시의 “종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라고 하면서,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지구를 고발하는 우주인의 시”를 종점으로 제시했다.(3판:515)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우선 성취하고 나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추구하는 세계문학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카자노바가 세계문학공화국의 지방에 속해 있는 작가는 “민족이 존재를 부여받고 따라서 국제적 차원에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인 독립” 이후에 비로소 “본질적으로 문학적인 자율성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던 것과 일치한다. 피지배 국가에서 초기 민족문학의 유산이 일단 축적되고 나면, 제임스 조이스 같은 “두 번째 세대”의 작가들이 나타나서 “자체로 구성된 민족문학 자원”에 기대면서도 “국제적이고 자율적인 문학 규범”을 참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카자노바는 “중심 밖에 자리한” 이 “두 번째 세대” 작가들이 “문학적 반란과 해방의 길”을 세련되게 다듬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문학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문학공화국에서는 민족문학이 축적된 이후에 등장하는 중심 밖의 지방 작가들이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에서 가장 잘 허용된 문학 형식, 문체, 코드를 혁신하고 뒤엎음으로써 현대성의 기준”을 바꾸고, “문학의 시간을 재는 척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온전한 의미에서 '중심 밖에 자리한' 이 '두 번째 세대' 작가들은 위대한 문학 혁명가가 된다. 즉 문학의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 특수한 무기로 싸운다. 그런 만큼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에서 가장 잘 허용된 문학 형식, 문체, 코드를 혁신하고 뒤엎음으로써 현대성의 기준과 따라서 세계문학 전체의 실천을 대폭 변화시키고 일신하고 심지어 전복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조이스와 포크너는 그토록 커다란 특수한 혁명을 실행해서 문학의 시간을 재는 척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모든 작품을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측정 수단, 지표가 되었고 다분히 아직도 이러한 측정 수단이자 지표이다."
김수영도 세계문학공화국의 지방인 한국에서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시발점”으로서 해결한 이후에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세계적인 시라는 “종점”을 향해 전진하고 싶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중심 밖에 자리한” “두 번째 세대”인 “조이스와 포크너”처럼 “위대한 문학 혁명가”의 길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수영의 시를 탈식민주의로 이해하는 연구는 일면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카자노바도 에드워드 사이드 등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이 “은폐된 문학의 정치적 진실”, “오랫동안 지배당한 나라의 정치사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출현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이 “문학을 정치로 귀착시키면서 각 작품의 미의식과 문학적 형식 그리고 축소할 수 없는 특이성이라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을 문제”를 “내적 비평”으로 떠넘긴다고 비판했다.
"문학의 특수성을 제쳐 놓는 일종의 이론적 생략이 매번 일어난다. 사이드의 경우 제국의 정치와 문화 사이의 연관은 놀랍도록 직접적이다. 즉 그는 문학을 정치로 귀착시키면서 각 작품의 미의식과 문학적 형식 그리고 축소할 수 없는 특이성이라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을 문제를 내적 비평으로 떠넘긴다. 이 비평가들은 정치, 이데올로기, 민족, 문학 차원의 쟁점을 매개하는 민족 및 국제문학 공간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문학 현상을 정치사의 연대기로 너무 심하게 낮춘다."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의 지방에 속한 작가는 문학적으로 종속되는 동시에 이 지배를 해방과 정당성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문학적 지배의 양면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탈식민주의에서 “식민지 문화의 유산일 것이라는 이유로 이미 구성된 문학 형식 및 장르의 강요를 비판하는 것”은 문학 자체가 하나의 공간 전체에 공통된 가치로서 “궁핍한 처지의 작가에게 특수한 인정 및 삶을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학적 지배의 양면성에 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속의 매우 특별한 형태인데, 이 형태를 통해 작가는 지배받음과 동시에 이 지배를 해방과 정당성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른바 탈식민주의 비평이 이따금 그렇게 하듯이, 식민지 문화의 유산일 것이라는 이유로, 이미 구성된 문학 형식 및 장르의 강요를 비판하는 것은 문학 자체가 하나의 공간 전체에 공통된 가치로서 물론 정치적 지배로부터 물려받아 강요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재적응되어 전형적으로 궁핍한 처지의 작가에게 특수한 인정 및 삶을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후에 자세히 밝혀지듯이 김수영은 한편으로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중의 생활난 해결을 위해 보편적 세계 문명도 매우 중시했다. 따라서 그는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던 다원적 세계시민주의자이지 일방적인 탈식민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박수연의 말대로 “개인이 전제되는 초국가적 세계문학”이나, 박상진이 주장했듯이 “비서구 대 서구, 전근대 대 근대, 주변부 대 중심, 특수 대 보편과 같은 이분법적 대립들” “사이의 왕복운동”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이 당시에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한 이유는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피식민지 경험을 지닌 지식인으로서 현대성(modernity)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가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던 1945년 해방 직후의 한국 사회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 등 세계적 문제가 곧바로 국내의 사회정치적 문제로 등장했던 시기였다. 당시 동양과 서양,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맞서서 그가 제시한 해결책이 다원적 세계시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이 번역가라는 전기적 사실도 그가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한 것과 관련이 깊다. 김수영이 산문에서 언급한 세계의 작가는 무려 100명이 넘고, 직접 작품을 번역한 작가도 적지 않다. 카자노바의 말대로 번역가는 “세계문학 게임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은 “중심 밖의 모든 작가가 문학 영역으로 접어드는 주된 경로”로서 “국제문학 공간에서의 투쟁이 띠는 특수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번역가로서 김수영은 “그리니치 자오선에서 포고된 현대성”을 들여와서 알림으로써 세계문학 공간의 “단일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번역가로서 세계문학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하는 동시에 과도한 서구 중심적 태도도 함께 비판하는 다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산문 「모기와 개미」(1967)에서 “요즘 잡지사가 그전보다 좀 깨었다고 하는 것이, 외국말을 아는, 외국에 다녀온 문인들을 골라서 글을 씌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이를 “구역질이 나는 경향”, “탈을 바꾸어 쓴 후진성”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3판:151-152) 박수연도 김수영이 쉬지 않고 번역에 몰두하면서 끝없이 세계문학을 의식했다고 하면서, 김수영에게 문학은 “나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고, 타자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세계문학이 한국문학화되는 것이었고, 한국문학이 자신의 목소리로 세계화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그의 시 작품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것이다.
한편, 본 연구는 김수영의 시 작품을 전기 1940~50년대 시와 후기 1960년대 시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 대상인 기본 텍스트는 민음사『김수영 전집1』의 1981년 초판본과 2018년 제3판본이다. 텍스트의 연도와 순서는 민음사 제3판본『김수영 전집1』을 기준으로 삼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시 전체 181편 가운데 세계시민주의적 긴장의 양상, 긴장의 해법으로서의 중용, 중용의 실천 방법으로서 시공간의 순환이 잘 나타나 있는 텍스트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긴장, 중용, 순환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텍스트들은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점을 중심으로 범주화할 것이다.
본 연구의 서술 순서는 먼저 김수영의 시에서 세계시민주의 논의의 하나인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의 긴장이 사회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의 긴장이 개인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그가 세계시민주의적 긴장의 해법으로 제시한 중용(中庸)이 헤겔의 변증법보다는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그가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시공간의 순환도 함께 제시했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제2장에서는 김수영의 시 작품에 나타난 긴장의 양상에 대해서 현대 세계시민주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그가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민족과 세계, 가족과 인간 사이의 긴장을 핵심 문제로 제기했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제1절에서는 김수영이 제시한 긴장론과 현대 세계시민주의 논의를 이론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가 민족과 세계, 가족과 인간 사이의 긴장을 핵심 문제로 제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제2절에서는 그의 시 작품에서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사회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히고, 제3절에서는 그의 시 작품에서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개인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그가 개별적 가족 생활만을 추구하는 소시민 문학이 아니라, 민족과 세계, 가족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핵심 문제로 제기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제3장에서는 김수영의 시 작품에 나타난 긴장의 해법에 대해서 중용(中庸)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주의를 제시했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제1절에서는 김수영이 제시한 중용(中庸)적 균형과 절제를 이론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가 양극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변증법이 아니라 다원주의를 제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제2절에서는 그의 시 작품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히고, 제3절에서는 그의 시 작품에서 중용적 절제를 통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보편적 세계문학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과 절제를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김수영의 시 작품에 나타난 중용의 실천 방법에 대해서 시공간의 순환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시공간의 순환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제1절에서는 『중용(中庸)』의 시중(時中)과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개념을 이론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가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시공간의 순환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제2절에서는 그의 시 작품에서 낮과 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비 오는 날과 맑은 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간의 순환이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히고, 제3절에서는 그의 시 작품에서 도시와 시골, 현실적 생활 공간과 초월적 자연 공간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공간의 순환이 유목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그가 이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