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시작(詩作) 초기인 1940년대 시에서부터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사회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민중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위해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해방 직후의 「묘정(廟庭)의 노래」(1945)에서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화자는 해방과 함께 “바람”처럼 몰아닥친 서양 세력들이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인 “남묘”의 “굳은 쇠 문고리”를 열고 들어와서 결국 남편을 잃은 “과부” 신세처럼 민족의 절반을 상실한 비극적 현실을 한탄한다.
여기서 한아(寒鴉), 즉 까마귀가 달빛 아래에서 밤새 울고 있었다는 “그날”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된 1945년 12월 28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가 1946년 3월 1일 《예술부락》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나, 외세를 상징하는 “바람”, 민족 절반의 상실을 상징하는 “과부” 그리고 남방의 수호신인 “주작성”이 북쪽으로 날아가다가 화살을 맞고 “반(半)절”이 되었다는 말이 암시하는 민족의 분단 등으로 뒷받침된다.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정부를 세우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창설하며,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대국에게 제안한다는 내용의 모스크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는 “그날”을 울었다고 반복하면서 신탁통치가 결정된 날이 사실상 민족 분단의 시작이라며 한탄한다.
「묘정의 노래」2부에서 화자는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적 공간인 남묘에서 민족의 “얼”을 깨우려고 한다. 그는 “백화(百花)”와 “만화(萬華)”, 즉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전통을 상징하는 꽃들의 “거동”이 민족의 “얼”을 흔들고, “향로”의 “향연”이 “관공”의 “색대”를 감돈다고 하면서, 강인한 민족정신으로 외세가 강요하는 민족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쓴다.
여기서 “관공(關公)”은 삼국지로 유명한 중국의 관우(關羽) 장군이고, “남묘”는 조선시대에 그를 무왕(武王)으로 모신 사당인 남관왕묘를 가리킨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장군들이 대일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관우 장군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믿고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이후 정조는 무왕(武王)인 관왕묘를 문왕(文王)인 공자의 문묘에 버금가는 국가적 제례로 정착시켜서 문무겸치(文武兼治)를 달성하고자 했다.
김수영은 산문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1965)에서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가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어린 시절의 성지”였다며, 거대한 관공(關公)의 입상(立像)이 어린 정신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고 회고했다.(전집:423)
이 시에서는 남과 북의 분단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 동묘를 “남묘”로 바꾸고, 관공의 “거대한 입상”처럼 외세에게 외경과 공포를 자아낼 정도로 민족의 얼이 떨쳐 일어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시의 끝부분에서는 “향로의 여연(餘烟)”을 찍어 “백련”을 무늬 놓는 “화공”으로 시인인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다.
그리고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라는 탄식으로 시를 마무리하면서,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는 자신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다는 한탄과 함께 민족의 얼을 잃으면 짐승으로 전락한다는 경고를 남긴다.
여기의 울음은 그의 초기 시에서 주로 나타나는 “설움”과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한탄에 그치지 않고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하는 내면적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으로서 민족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기 위해 관공처럼 강인한 민족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산문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1965)에서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묵살의 대상이었던 ≪예술부락≫에 실린 이 작품 때문에 당시에 박인환으로부터 낡았다는 수모를 받았으며, “무슨 불길한 곡성” 같은 것이 배음으로 흐르고 있는 “의미 없는 시”이므로 자신의 텍스트 목록에서 지워 버렸다고 고백했다.(전집:423)
하지만 이 시에 대한 그의 부정적 평가는 “대체로 시인들이 자신의 옛 작품을 낯부끄러워하는 것”이거나, 이후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자신의 처녀작에 민족주의가 과도하게 노출되었다는 자기비판이지 민족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그가 이후에도「더러운 향로」(1954),「거대한 뿌리」(1964) 등 민족주의적 시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던 사실로 뒷받침된다.
- 문학박사 이건주
「묘정(廟廷)의 노래」(1945)
1
남묘(南廟) 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과부의 청상(靑裳)이어라
날아가던 주작성(朱雀星)
깃들인 시전(矢箭)
붉은 주초(柱礎)에 꽂혀 있는
반절이 과하도다
아- 어인 일이냐
너 주작의 성화(星火)
서리 앚은 호궁(胡弓)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한아(寒鴉)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2
백화(百花)의 의장(意匠)
만화(萬華)의 거동이
지금 고오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관공(關公)의 색대(色帶)로 감도는
향로의 여연(餘烟)이 신비한데
어드매에 담기려고
칠흑의 벽판(壁板) 위로
향연(香烟)을 찍어
백련(白蓮)을 무늬놓는
이 밤 화공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