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자 김수영 나의 가족

by 이건주
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개인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세계시민으로서 자유와 사랑, 인류 복지와 세계평화 등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나의 가족」(1954)에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고색(古色)”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변화의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에 나가서 일하다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작지만 그래도 돈을 벌어오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그는 가족을 “장구한 세월” 동안 “파도”처럼 옆으로 흘러가고, “세대” 간에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이라며 대단히 긍정한다. 심지어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즉, 가족적 사랑이 “겨울바람”보다 더 자신의 눈을 밝게 한다고 하면서,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가장으로서 그들에게 자신의 “전령(全靈)”을 맡겼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계시민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인간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을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긴다고 하면서, 민족적인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세계시민적인 “우주의 위대감”도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부자연한 곳”이 없는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긍정하면서, “유순(柔順)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현실 공간인 “방”에서 차라리 “위대한 것”, “위대의 소재”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것은 전쟁 직후의 폐허 속에서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위대한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이 “사랑”인지,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인지 묻는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장구한 세월” 동안 흘러왔으므로 “낡은 것”이지만 그래도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계시민으로서 인간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가족적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나의 가족」(1954)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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