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사회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위해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중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라디오 계(界)」(1967)에서도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라디오 주파수를 나열하다가 “이북(以北) 방송”인 “10점 5”를 만나자 몸서리치며 놀란다. 당시 청취가 금지된 북한 방송을 통해 민족 분단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일본 방송이 들리지 않을 때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낭랑한 일본 말”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처럼 소중했지만, 지금 “HIFI”로 들을 수 있게 되자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시시한” 소리로 전락하여 안 듣게 된 “이상한” 일을 얘기한다.
그는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를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 소리보다도 더 발광(發狂)을 쳤을 때와 병치시키고, “일본말”을 돈을 상징하는 “금덩어리” 같던 소리에 비유하면서 HIFI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가치를 강조한다.
과거에 우리가 일본 방송을 금덩어리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일본의 높은 과학 문명 수준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비참”했던 우리도 “HIFI”가 나오는 수준에 도달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동경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북(以北) 방송”도 “불온(不穩) 방송”이 안 되어 쉽게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아무런 “미련”이나 “회한”도 없이 북한 방송을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HiFi 덕분에 일본 방송을 안 듣게 된 것처럼 배부르게 “저녁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남한의 물질문명이 발전하면 북한 방송을 “불온 방송”이라고 금지하지 않아도 남한 사람들이 듣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북한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안 되는 날까지는 이 “엉성한 조악한” 방송들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라는 “극도의 낙천주의”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서 “배가 부른 탓”이라고 밝힌다. 북한 방송을 못 듣게 하려고 금지할 것이 아니라, 배가 불러서 북한 방송을 들을 필요가 없도록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시작 노트라고 할 수 있는 「반시론」에서 “우리의 미래에도 과학을 놓아야 한다.”(전집:515)라는 주장으로 뒷받침된다. 여기서 그는 민족 통일이 “참여시의 종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참여시의 시발점인 민족 통일만 강조하지 말고, 참여시의 종점인 “미래의 과학 소설”, 거대한 스케일의 “과학시”, “지구”를 고발하는 “우주인”의 시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한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안 되는 날, 더 나가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보편적 세계 문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라디오 계」(1967)
6이 KBS 제2방송
7이 동 제1방송
그 사이에 시시한 주파가 있고
8의 조금 전에 동아방송이 있고
8.5가 KY인가 보다
그리고 10.5는 몸서리치이는 그것
이 몇 개의 판테온의 기둥 사이에
뒹굴고 있는 폐허의 돌조각들보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隣國의 음성
- 물론 낭랑한 일본 말들이다
이것을 요즘은 안 듣는다
시시한 라디오 소리라 더 시시한 것이
여기서는 판을 치니까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더 시시한 우리네 방송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지금같이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 소리보다도 더 발광을 쳤을 때
그때는 인국 방송이 들리지 않아서
그들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 같았다
그 금덩어리 같던 소리를 지금은 안 듣는다
참 이상하다
이 이상한 일을 놓고 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해 본다
지금은 너무나 또렷한 입체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북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 말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회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도 내가 반공산주의자(反共産主義者)가
아니 되기 위해서는 그날까지 이 엉성한
조악(粗惡)한 방송들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먼저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극도의 낙천주의를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서 해본다
- 아아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른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