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주의자 김수영의 꽃

by 이건주
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사회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민족의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위해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중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꽃」(1960)에서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화자는 “심연(深淵)”이 자신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세계의 노예”들을 “멀리” 바라본다고 하면서, “진개(塵芥)와 분뇨(糞尿)”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을 얘기한다.


이것은 그동안 “시대의 궁핍함으로 인해 빚어진 존재 자체의 위기의식”을 뜻하는 정신적 “심연(深淵)”만 추구하다 보니, “진개(塵芥)와 분뇨(糞尿)” 같이 더러운 생활에 구속되어 있는 “노예” 같은 인간들을 그저 “멀리” 바라보면서 “꽃”처럼 아름다움만 추구해 왔다는 자기비판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민중의 생활난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보편적 세계 문명을 외면하고 과도하게 전통적 정신만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 생활을 부정하는 “자기 상실”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는 “신(神)”뿐이고, 자신을 비롯한 인간은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헤겔은 신이 “자기 상실과 타자화, 그리고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양이라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변증법적 운동”을 거치면서야 비로소 거룩한 정신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바로 신의 인간화와 신을 향한 인간의 고양을 통해 신과 인간, 무한자와 유한자, 이념과 현실, 무상(無常)과 영원이 서로 화해하고 합일되는 신비의 정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은 신과 달리 물질적 생활을 부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현실 공간인 “돼지우리” 위에도 자연적 정신을 상징하는 “새”가 날고, “국화꽃”도 “밤”이면 이슬에 젖어 더 아름다워지는데, “동네 아이들”은 “올겨울”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들”을 갈라가고, “손”도 안 씻고, “닭”에게 발등을 물린 채 가난하게 살고 있다며 한탄한다.


그래서 시골에도 “도회”처럼 물질문명의 혜택을 베풀어서 가난으로 인해 “영영” 사라져버린 “미소”를 되찾아 주는 것을 자신의 “숙제”로 삼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난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국화꽃”을 보고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는 보편적 세계 문명의 발전을 자신의 “숙제”로 삼겠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꽃」(1960)


심연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들을 바라본다

塵芥와 분뇨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

그러나 심연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 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도야지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 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데

올 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라갈 동네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두고

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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