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개인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세계시민으로서 자유와 사랑, 인류 복지와 세계평화 등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장시2」(1962)에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화자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상징하는 “시금치밭”에 거름을 뿌려서 “파리”가 들끓고, 이틀째 흐린 가을날은 무덥기만 해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 소리도 “옛날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지고, 눈도 “소경”처럼 어두워진다고 한탄한다.
이것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던 시절이 “옛날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지고, 이를 찾던 “눈”도 어두워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상징하는 “기적(汽笛) 소리”와 보편적 인간 정신을 상징하는 “하늘” 사이를 “고무공”처럼 오가려고 했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외계”의 소리를 여과하고 채색해서 생활과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재신인 “젤라틴지(紙)”가 그립다고 고백한다.
그가 「반주곡」(1959)에서 “젤라틴을 통해서 시의 진지성을 본다.”라고 말했듯이 과거에는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었는데, 지금은 개별적 가족 생활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으므로 그때가 그립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자기를 항시 괴롭히는 “땅 주인”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그처럼 누구인가를 괴롭히고 있는 “고문인(拷問人)”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서로를 고문하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의 숙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초월해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초현실”을 “생활의 정수(定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남을 고문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혼미”하는 “아내”와 날이 갈수록 간격이 생기는 “골육”인 형제, “새”가 아직 모여들 시간이 못된 “늙은 포플러나무” 같은 어머니 등 자신을 소리 없이 “괴롭히는” 가족을 “신”이 보낸 “고문인”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생활 능력이 없어서 “어른”이 못 되는 자신을 탓하는 “구슬픈 어른들”인 가족들을 향해 “방황할 시간”, “불만족의 물상(物象)”을 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두부”를 엉기게 하는 따뜻한 “불” 같은 가족의 사랑도, “졸고 있는 잡초” 같은 여유로운 생활도 “무감각의 비애”로 상징되는 보편적 인간 정신이 없으면 “죽은 것”처럼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가족을 위한 생활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술 취한 듯한 “동네 아이들”의 함성, 미쳐 돌아가는 “역사의 반복” 같은 물질문명의 폐단을 치유하려면, 나무뿌리를 울리는 “신”의 발자국 소리 같은 보편적 인간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가난한 침묵”, 먹고살기 위해 싸우는 “백주(白晝)의 활극”으로 인해 “밤”보다도 더 어두운 “낮”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이기적 생활의 “시간”을 잊은 “마음의 승리”를 얻으려면, “환상이 환상을 이기는 시간”, 쉬면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대시간(大時間)”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먹고살기 위해 서로를 고문하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의 숙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장시2」(1962)
시금치밭에 거름을 뿌려서 파리가 들끓고
이틀째 흐린 가을날은 무더웁기만 해
가까운 데에서 나는 인성(人聲)도 옛날이야기처럼
멀리만 들리고
눈은 왜이리 소경처럼 어두워만지나
먼 데로 던지는 기적(汽笛)소리는
하늘 끝을 때리고 돌아오는 고무공
그리운 것은 내 귓전에 붙어있는 보이지 않는 젤라틴지(紙)
―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처럼
외계(外界)의 소리를 여과(濾過)하고 채색(彩色)해서
숙제(宿題)처럼 나를 괴롭히고 보호한다
머리가 누렇게 까진 땅주인은 어디로 갔나
여름저녁을 어울리지 않는 지팽이를 들고
이방인(異邦人)처럼 산책하던 땅주인은
―나도 필경 그처럼 보이지 않는 고문인(拷問人)
시대(時代)의 숙명(宿命)이여
숙명(宿命)의 초현실(超現實)이여
나의 생활(生活)의 정수(定數)는 어디에 있나
혼미(混迷)하는 아내여
날이 갈수록 간격이 생기는 골육(骨肉)들이며
새가 아직 모여들 시간이 못된 늙은 포플러나무며
소리없이 나를 괴롭히는
그들은 신(神)의 고문인(拷問人)인가
―어른이 못 되는 나를 탓하는
구슬픈 어른들
나에게 방황(彷徨)할 시간을 다오
불만족(不滿足)의 물상(物像)을 다오
두부를 엉기게 하는 따뜻한 불도
졸고 있는 잡초도
이 무감각(無感覺)의 비애(悲哀)가 없이는 죽은 것
술취한 듯한 동네아이들의 함성(喊聲)
미쳐돌아가는 역사(歷史)의 반복(反覆)
나무뿌리를 울리는 신(神)의 발자죽소리
가난한 침묵(沈黙)
자꾸 어두워가는 백주(白晝)의 활극(活劇)
밤보다도 더 어두운 낮의 마음
시간(時間)을 잊은 마음의 승리(勝利)
환상(幻想)이 환상(幻想)을 이기는 시간
―대시간(大時間)은 결국 쉬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