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후기인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감정을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인 세계시민이 양자택일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세인(世人)들에게는 비정상적이고 분열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 통념에 맞서서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성(性)」(1968)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를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그것”과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자신이 “섹스”를 “개관(槪觀)”, 즉 대충 살펴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것”을 보편적 정신의 상징으로, “여편네”를 개별적 생활의 상징으로, “섹스”를 사랑으로 보면, 그동안 과도하게 보편적 정신만 사랑하다 보니 개별적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상징적인 고백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정신(그것)을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게” 열렬히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여편네)을 위해 “어지간히 다부지게” 애를 써도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생활이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가장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선언한다.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황홀(恍惚)의 순간”이지만,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 생활(여편네)을 위해서 속아서 사는 불쌍한 “연민(憐憫)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편네(개별적 가족 생활)에게로 다시 돌아와서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고 고백하면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은 개별적 생활(여편네)만 과도하게 추구하다 보면 보편적 정신(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는 가족의 생활난 때문에 여편네(개별적 생활)에게로 돌아왔지만, “지독하게” 속여서 자신이 속고 마는 상황이 되면 다시 그것(보편적 정신)으로 돌아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가 「반시론」(1968)에서 “나는 프티 부르주아적인 “성”을 생각하면서 부삽의 세계에 그다지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는다.”(3판:511)라고 말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성”으로 상징되는 가족의 생활과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프티 부르주아적 태도는 “부삽”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그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보편적 정신(그것)과 개별적 생활(여편네)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할 수 있도록 중용적 절제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 문학박사 이건주
「성(性)」(1968)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이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 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황홀(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