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와 하루의 순환:김수영의 풀

by 이건주
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하루와 하루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맑은 날에는 밭을 갈고, 비 오는 날에는 글을 읽으라는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맑은 날에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비 오는 날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마지막 작품인 「풀」(1968)에서는 흐린 날과 맑은 날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누워서 울었다고 하면서,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고 말한다. 이미 「비」(1958)에서 비 오는 날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인간적 “비애(悲哀)”를 추구하라고 주문하고, 「여름밤」(1967)에서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부는 날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이라고 규정했듯이 “비”를 몰아오는 “동풍”이 부는 흐린 날에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러 나가지 말고, 그냥 “누워”서 비애와 사랑 같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는 풀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며,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말은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풀이라는 자연적 현상에 반하는 진술이기 때문에, 풀을 “민중”으로, 바람을 “불의와 부당한 탄압”이나 “적대적인 적”의 상징으로 이해하면서 의로운 민중이 부당한 독재를 이길 수 있다고 해석하는 근거가 되어 왔다.


하지만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을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바람이 불면 서 있던 풀이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것처럼 누워 있는 풀에 맞바람이 불면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말은 누워 있는 풀에 맞바람이 불면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듯이 사람도 맑은 날에는 “먼저”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비바람이 부는 흐린 날에는 바람보다 “빨리” 누워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비가 그치고 맑은 날에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식으로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날이 흐려서 풀이 “발목”, “발밑”까지 눕는다고 하면서, 흐린 날에는 일어나지 말고 “발목”, “발밑”까지 누워서 철저하게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한다. 그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고,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다고 하면서 “늦게”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후란넬 저고리」(1963)에서처럼 생활난이 극심하면 흐린 날에도 “빨리” 누워서 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풀은 바람보다 “빨리”든 “늦게”든 눕고 울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 존재이다. 이것은 흐린 날에 “빨리”든 “늦게”든 누워 울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맑은 날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고 웃을 수 있도록 “먼저”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흐린 날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누워 울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맑은 날에는 가장으로서 생활난을 해결하고 웃을 수 있도록 일어나서 개별적 생활에 집중하는 시중(時中)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주된 대립 구도를 “풀과 바람”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비를 몰아오는 동풍”은 풀에게 필요한 비를 제공해주는 존재이므로 풀과 바람이 생태생물학적으로 서로 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의 주된 대립 구도는 흐린 날과 맑은 날이라는 시간의 긴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람’은 풀을 눕게도 만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비를 몰고 오는 “동풍”은 풀을 눕게 만드는 바람으로서 ‘흐린 날’을 상징하고, 누워 있는 풀 앞에서 부는 바람은 풀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만드는 바람으로서 ‘맑은 날’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풀’은 흐린 날에 부는 바람을 맞으면 누워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맑은 날에 부는 바람을 맞으면 다시 일어나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다원적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의 변화에 따라 누웠다가 일어나고, 울다가 웃다가를 무한히 반복하는 풀처럼 사람도 흐린 날과 맑은 날이라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풀」(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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