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봄·여름·가을·겨울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농촌에서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의미의 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처럼 노동의 계절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고, 휴식의 계절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여름 뜰」(1954)에서는 여름과 겨울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여름 뜰”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자신이 “부자유한 생활”을 하는 이유가 “주름살”과 “굴곡(屈曲)”으로 상징되는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여름 뜰”은 “자연의 표상”이 아니라, 반대로 “여름”이 노동의 계절이고, “뜰”이 생활을 위한 현실 공간이므로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현실적 시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여기 “여름 뜰”에서 개별적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언어”가 “시”로 통할 때, 즉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언어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를 침범하여 생존의 문제가 닥칠 때에는 자유를 요구하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처럼 현실적 시공간인 “여름 뜰”의 “광대한 손”을 보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개별적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고 대담하게 말했지만, 생활난이 극심해지면 “젖먹는 아이”처럼 “여름 뜰”이라는 현실적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여름 뜰”에서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 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내린다고 말한다.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시공간을 부정하지 말고, 오히려 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와 비합리의 사이”에 앉아 있는 자신의 표정에 “우습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이 섞여 있다고 덧붙인다. 자신은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자유”, “합리”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과 “여름 뜰”, “비합리”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을 모두 긍정하고, 그 사이에서 “우습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다시 비판하면서, “크레인의 강철”보다도 강한 “황금빛”, 즉 물질문명 시대 황금만능주의를 “꺾기 위하여” 달려가는 “조그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은 비록 생활의 시공간인 “여름 뜰”에서 먹고살기 위해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 자유롭게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편적 정신을 위한 “질서”와 개별적 생활을 위한 “무질서”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면서, “여름 뜰”에서는 영혼이 사라진 “시체”나 다름없이 살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현실적 시공간인 여름 뜰을 무조건 부정하면서 “흘겨” 보거나 무조건 긍정하면서 “밟아서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묵연(黙然)히 묵연(黙然)히”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더라도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름 뜰”이라는 노동의 시공간을 긍정하고 “부자유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문학박사 이건주
「여름 뜰」(1956)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모-든 언어가 시에로 통할 때
나는 바로 일순간 전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이지러진 얼굴로
여름 뜰이여
너의 광대한 손을 본다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 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내리는 여름 뜰을 보면서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 있는
나의 표정에는 무엇인지 우습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마저 섞여 있다
그것은 둔한 머리에 움직이지 않는 사념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크레인의 강철보다 더 강한 익어 가는 황금빛을 꺾기 위하여
너의 뜰을 달려가는 조그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여름 뜰이여
나는 너에게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노라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생활은
섧지가 않아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 뜰을 흘겨보지 않을 것이다
여름 뜰을 밟아서도 아니 될 것이다
묵연히 묵연히
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