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생활과 자연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가장으로서 현실적 생활 공간에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세계시민으로서 초월적 자연 공간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공간의 순환을 유목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사치」(1958)에서도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이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어둠”, “겨울”이라는 휴식의 시간에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주전자”, “흰 벽”, “불”을 등지고서 “해바라기”, “성황당”이 보이는 초월적 자연 공간인 “산”에 “나들이”를 갔다 온다. 그리고 “문명(文明)”된 “아내”를 껴안아도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연 공간에서 얻은 정신적 힘을 통해 “아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는 “새로 파논 우물전”과 “도배를 하고 난 귀얄”을 씻고 간 “두붓집” 아가씨에게 “수고의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동안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수고했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나들이”를 갔다가 “아들놈”을 두고 왔다는 충격적인 말도 이제는 휴식의 계절인 겨울이 되었으니 가장으로서 자식을 부양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문명된 아내”에게 실력을 보려면, 속세의 때가 묻은 “발”부터 씻고, “냉수”와 “맑은 공기”처럼 깨끗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라는 대로 하고, 느끼라는 대로 느낄 뿐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초월적 자연 공간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가족의 생활난이 심해지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이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에게 오늘 밤에 자신의 “사치”를 받기 위해 “불을 끄자”라고 거듭 말한다. 이제 휴식의 시간인 “밤”이 되었으니 “아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에 맞서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사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친 생활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사치”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서어서 불을 끄자”라고 재촉하면서,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의 시를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사실적 고백으로만 해석하면, 여기서 나들이를 갔다가 “아들놈”을 두고 오는 비정상적인 아버지, 그러면서도 아내와의 잠자리만 재촉하는 성적 욕망의 화신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의미와 무의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라는 관점에서 숨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찾아보면, 휴식의 시간인 겨울밤에 가장으로서의 생활난 해결이라는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는 “사치”를 누리려는 다원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 문학박사 이건주
「사치」(1958)
어둠속에 비치는 해바라기와…… 주전자와…… 흰 벽과……
불을 등지고 있는 성황당이 보이는
그 산에는 겨울을 가리키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네
나들이를 갔다 온 씻은 듯한 마음에 오늘밤에는 아내를 껴안아도 좋으리
밋밋한 발회목에 내 눈이 자꾸 가네
내 눈이 자꾸 가네
새로 파논 우물전에서 도배를 하고 난 귀얄을 씻고 간 두붓집 아가씨에게
무어라고 수고의 인사를 해야 한다지
나들이를 갔다가 아들놈을 두고 온 안방 건넌방은 빈집 같구나
문명(文明)된 아내에게 <실력을 보이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발이라도 씻고 보자
냉수도 마시자
맑은 공기도 마시어두자
자연이 하라는 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 대로 느끼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여
길고긴 오늘밤에 나의 사치를 받기 위하여
어서어서 불을 끄자
불을 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