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는 극히 좁지만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모두 어린 시절 만난 친구이기에 그 친구들이 없는 삶이 잘 상상이 안 된다.
여기서 상상이 안 간다는 건 그 친구들이 없는 삶이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슬픔이다'의 뜻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함께했기에 말 그대로 '없었다면?'이라는 가정 다음에 오는 상황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친구가 없기에 슬픔이 있을지,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또 다른 삶을 살아갈지 모르겠다. 상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데도 현실 친구를 없애는 상상을 하려니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관계가 좁아진다고 하는데 더 좁아질 인간관계는 없지만 현재 남은 관계에서 더 좁아지면 좁아졌지 크게 늘어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삶을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수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여야 하는 어른에게 친구와의 관계를 끊는 것, 흔히 말해 ‘손절’은 무 자르듯 쉬운 일이 되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주위에서는 그 존재와 하루빨리 손절할 것을 권한다.
좁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감사한 것이 있다면 손절할 만한 관계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에서 전혀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른 너머의 친구 관계가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조금 서글퍼진다. 아주 사소하고도, 어찌 보면 너무 유치하기도 하지만 이는 내가 친구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정당화 해본다.
이를테면 항상 일상을 공유하고, 함께하던 친구의 일상이 간주 점프를 두 번 한 것처럼 여백이 생길 때이다. 자취를 시작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든지, 승진을 했다든지라는 친구의 대소사를 내가 한발 늦게 축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나열하니 친하지 않은 관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이런 일이 한두 개 늘어나다 보니 나도 반발심이 들었다.
나도 내 맘을 닫아야지 하는. 유치한 생각.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게는 대소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인생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어 친구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건 나는 아직까지 우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놀이터에서 멀리뛰기를 하던 초등생도 아니고, 석식을 먹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여고생도 아닌데 나만 이 공간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현재 누구보다 치열해야 하며, 점심쯤은 맛이 아닌 생존을 위해 먹는 직장인일 뿐인데 멈춰버린 공간 속에서 나만 친구에게 점심시간에 매점을 가자며 소리치는 여고생으로 남아있는 듯해 잠시 서러웠다.
서른이 넘은 우리의 시간은 대부분은 일로 채워가고, 그중 일부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그리고 가끔은 친구와 함께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맞다.
서른 너머의 친구는 소중하다. 점점 좁아지는 생활 반경에 들어와 나를 꺼내 주니까.
하지만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그 좁은 원이기에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할 것도, 아쉬울 것도, 변명할 것도 없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함께하길.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 남아준 친구들에게 전하지 못할 감사의 인사를 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