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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머 Dec 06. 2021

아기로 태어나 다시 아기로 돌아가기까지.

나이를 먹으면 아기 같아지다는 말이 있다. 또다시 '아이'의 시간을 지나 '아기'가 될 때에 우리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아기에서 어린이에서 청소년, 성인 그리고 아기로 가기까지. 그 안에 각자의 삶이 녹아있다. 


가령 어린 시절 용맹한 호랑이처럼 엄하던 아빠가 예전 같으면 버럭 화를 냈을 만한 순간에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흐물흐물 넘어가는 순간을 봤을 때,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가지고, 한 걸음에 달려왔던 엄마가 루테인을 주문해 달라고 하며, "우리 oo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라고 할 때면 어느 순간 내가 부모님의 부모가 되어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나는 결혼도 안 한 미혼에 아이도 없지만 어른 아이의 양육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를 양육하지만 엄마에게도 양육자가 존재한다. 엄마가 양육하는 할머니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더욱 많은 수고를 수반한다. 엄마의 양육자인 나는 손가락 몇 개만 움직여 루테인을 주문하면 되지만 다시 아기가 된 할머니의 경우 식사부터 목욕까지 챙겨야 할 것이 더욱 많아진다. 엄마가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받았던 일련의 과정들을 그대로 다시 물려받는 것이지만 진짜 아기보다 두 자리 숫자의 어른 아기의 양육은 마냥 즐겁다기보다 서글퍼질 때가 더욱 많다. 어른 아기의 모습 속에 시간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엄마랑 지낼 때도 독립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시골에 가고 싶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시골에 가고 싶은 이유도 있겠지만, 양육자인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네가 힘들잖아,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는 아이처럼 철없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엄마는 아이처럼 수줍게, 또 철없이 들리는 할머니의 말에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어느덧 완연한 아기가 되어 있었다. 


엄마도 뒤늦은 양육에 몸도 마음도 지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에게 그만 버럭 해버리고 말았다. 아기가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여기지만 귀가 안 좋은 어른 아기와 의사소통이 안될 때면 곧이어 큰 목소리의 짜증이 이어진다. 어른이 아기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지만, 어른 아기에게는 이해를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해하기 힘이 들 때면 그냥 포기하고 말아 버린다. 


디지털의 발달로 어느 곳 하나 문명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햄버거를 하나 사러가도 점원과 눈을 맞추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키오스크의 등장은 모두에게 생소했지만 학습이 가능한 세대에게는 키오스크는 이로운 기계가 되었다. 하지만 키오스크는 모든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키오스크 사용법을 가르쳐 드린다는 글을 적지 않게 보았다. 우리 엄마, 아빠가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해서 햄버거를 먹지 못하게 되는 건 너무나 속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속상한 일은 버벅거리는 부모님의 손길 뒤로, 따가운 시선을 주고받는 우리 세대의 눈칫밥을 먹는 부모님을 보는 일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갈 곳 잃은 손가락을 열심히 눌러보는 분들이 우리 부모님일지도 모르니 조금 더 관용을 베풀어 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순간, 나도 '엄마가 키오스크를 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 끝에는 '엄마는 그런 곳에 가지 않을 거야'로 마무리 지어버리는 나쁜 양육자가 있었다. 나의 책임은 엄마를 씻기고, 입히고,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이 사회에 잘 융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언제나 나는 나의 책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사는 동안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 아기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사실만은 변치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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