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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때문에 퇴사하고 그 이후

멀고도 가까운 상사와의 관계

어렸을 때부터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아 뉴페이스들을 만날 때면 ‘이번 1년은 어떤 친구들과 관계를 맺어야 무난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부터 앞서곤 했다. 반에 들어서는 순간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는 움직임,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들이 서로 부딪히다 말을 트고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표하지만 지내다 보면 싸우고 토라지고 멀어지는 과정이 꾸준히 반복됐다.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포장하기에는 스스로 느끼는 감정 소모가 너무 컸다. 일정 수준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 초등학교, 중학교, 거의 고등학교까지 무리에 소속되기 위한 노력,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들이 오고 갔다.


상사와 이별하다


직장인이 되어서는 또 다른 문제로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바로 상사와의 관계. 첫 직장에서 일머리가 zero에 가깝던 나와 달리 직속상사는 뭐든지 능숙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분이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업무 피드백을 받곤 했는데 전화를 하거나 메일을 보내면 말할 때 내용, 메일 토씨 하나하나에 대해 세세하게 피드백을 줬다. 상사 입장에서는 후임이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을 쓴 것이겠지만 갈수록 짜증이 늘어가는 상사를 대하는 후임의 일상은 점점 버거워졌다.


퇴사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당시 회사에서는 공용으로 사용하는 업무용 메일이 있어 메일을 보내면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하루는 거래처 선생님에게 보낸 메일로 상사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안녕하세요~’라고 쓴 것이 문제가 된 것. 선생님한테 메일을 보내는 데 왜 물결을 썼냐는 것이다. 그래서 상사가 보낸 메일을 참고하면서 물결 표시를 봤었고 문제가 없다 생각했다고 답변했더니 “너와 나는 다르지, 나는 선생님과 더 친하잖아”라고 혼났던 기억이 난다. 상사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들이 내면에서 한꺼번에 폭발했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고 삐----소리와 함께 그곳에서의 인연도 끝났다.


퇴사는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닌 도피다. 관계를 차단하면서 일시적으로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만 살다 보면 또 다른 유형의 상사를 만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인간관계가 힘들어 회사를 안 다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나 같이 예민하고 적응 못하는 아이가 어딜 가서 일할 수 있을지 자괴감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현실은 계속된다.


퇴사할 때는 회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일해보자 했지만 편히 쉬다 보니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존재할만한 회사를 만나게 되지도 않을까’하는 근거 없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성공적인 직장을 만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지금이 그때가 아닌 것뿐이다. 10번 회사를 이직하고 비로서 그럭저럭 본인과 맞는 회사를 만났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세월이 흐르고 직급이 오르며 후임과 함께 할 때면 첫 직장에서 만났던 상사가 떠오르곤 한다. 신입시절에는 원망스럽고 다가가기 어렵기만 한 상사였는데 내가 그 위치가 되고 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본인 업무도 해야 하는데 후임을 가르치고 끌고 나가야 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것이라 본다. 본인은 빠릿빠릿한데 느리고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그때의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열심히 하는 후임의 모습은 보기 좋지만 본인의 기준치에 맞지 않으면 후임의 열정 따위는 상사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이란 걸 몰랐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아쉬워하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는데 상대방이 어찌 알겠는가. 물론 상사의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내가 갈굼 당하는 상황은 납득하기 어렵다. 상사는 지위를 이용해 상대적 약자인 후임에게 단순히 화풀이를 하는 인성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다만 상사의 말에 자존감을 낮추며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말 한 마디에 나의 모든 감정과 상황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회사의 모든 것은 마음에 드는데 ‘상사’만 문제다. 쉽지 않겠지만 상사와 대화로 원만한 해결을 시도해본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회사에 이야기하여 보직 이동을 하거나 상사를 최대한 피하여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혹자는 업무적으로 숙달될 때까지 일단 견뎌본다고 하는데 몸이 망가질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하다면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다.


혹시 회사가 견딜만한 이득도 없고 상사가 개차반이라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가장 마지막 단계인 퇴사 카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코로나 시국으로 취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생계형 직장인에게 '무조건 퇴사'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퇴사하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데 거기 있다가 죽으면 안되지 않는가.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상사는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이전처럼 전전긍긍해하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지는 않는다. 현 직장의 상사는 대화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고 의견을 받아들여 주는 스타일이며 사사건건 사람을 쥐잡듯이 잡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미 최악을 경험해 본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상황은 견뎌낼 맷집이 생겼다. 그리고 본인이 절대로 견디지 못하는 상사 유형과 어느 정도 공생할 수 있는 정도의 상사 유형을 스스로 알고 있다. 상사와 나도 스스로 궁합을 맞춰보게 되고 때론 합(合)이 엇나가곤 하지만 조금씩 맞춰나가는 것이 직장인의 순리다.


특히 신입사원이라면 지금 안 맞는 사람과 괴롭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본인과 잘 맞는 곳,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상황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기억하며 오늘도 인간 관계로 인해 힘든 직장인들이여, 힘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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