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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행복한가요?

훗날 돌아봤을 때 지금 이 순간을 '행복'으로 떠올리길 바라며

화장실 공사를 하면서 집이 깨끗해졌다. 버리는 즐거움을 알게 된 엄마는 무언가를 자꾸 버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보관해 온 초등학생 때 쓴 일기, 고등학교 공부한 노트도 엄마 눈에는 분리수거물에 불과했다. 나중에 시집 갈 때 쓰레기가 될텐데 뭐하러 가지고 있냐는 식이었다.


평소 무엇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일까, 아니면 과거에 대한 집착 때문일까? 때 묻은 일기장과 공부 노트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 고등학생 시절 공부했던 내용은 모두 지나간 일인데 그 시절을 담고 있는 일부분을 버리는 것만으로 추억이 삭제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의 내가 썼던 일기. 세상 다 산 것처럼 앓는 소리하고 힘들어 하는건 초등학교 5학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조숙한건지 허세가 심했던 건지 어렸을 적 나는 삶에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반 친구들과 함께 제작한 학급 일지도 있었다. 그곳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지금은 30살이 다 됐을 친구들이 6학년 친구들을 떠나보내며 써준 롤링페이퍼가 들어 있었다.


오래 전이지만 기억이 난다. 롤링페이퍼를 받기 전 친구들이 내게 어떤 말을 써주었을까 내심 기대하며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친구들이 내게 써준 편지를 읽었던 기억. '졸업해도 나를 잊지마. 건강하게 잘 지내'와 같은 말을 상상했는데 의외의 이야기가 꽤 있었다. '그 동안 나한테 장난친거 기억나? 설마 장난친 거 잊진 않겠지? 중학교 가서는 그러지마' 라고 쓴친구가 있었다. 몰래 뒤에서 찌르고 달아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안한 일이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어린 시절,
지금의 나는 방향성을 상실한 것만 같다


맨 밑에는 선생님이 적어주신 내용도 있었다. '소설가 영주의 능력을 기대해 본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를 항상 격려해주셨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때는 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는데 지금의 나는 무엇을 향해 가는 것인지 방향을 잃고 흘러가는 돛단배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 순간 순간이 참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초등학교 6학년의 나는 그 순간의 소중함을 몰랐지만 19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를 기억하니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중하다고 느껴지듯 흘러가는 지금도 소중하다는 걸 안다. 훗날 돌이켜 봤을 때, 30대의 내가 초등학교 6학년처럼 어리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그때도 앞자리 수가 갓 3으로 바뀐 나를 그리워할까. 일기장을 읽으며 잠시 그 시절을 그리워했지만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만나게 될 나에게는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보내주었던 일기장이 고마웠다. 너무 많은 정보들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기억을 다시 맨 앞으로 끄집어내 준 일기장. 무언가를 통해 다른 세계의 나를 만난다는 건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다. 엄마에게는 별 거 아닌 폐휴지겠지만 내겐 기억의 실마리로 통하는 문이니까.


내 추억들은 다시 고이 접어서 책장에 꽂아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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