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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평김한량 Sep 27. 2016

나에게 동기부여란?

희망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제가 작성한 글 중에 질문이 달렸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동기부여가 되어준 것을 함께 나눠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삼일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진부한 이야기 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대답을 희망이라고 적었습니다. 


 제 글 중에 '나를 찾아 삼만리'를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인생이 잘 풀린 사람은 아닙니다. 창업을 시작한 후. 망해서 사무실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능력에 비해서 일을 크게 벌렸다가 여러 사람을 실망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겪은 일 중에 가장 힘들 었던 시기. 그리고 희망을 보았던 시절 이야기를 조금 나눠볼까 합니다. 


양평 김한량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도 '희망'을 담아서 만든 닉네임입니다. 그 희망이 있기 전 약 20년 전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IMF 시절. 


저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서 되돌아옵니다.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 학교도 다니고 그곳에서 영어도 배우고 여러 가지 공부를 할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 사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한국에 되돌아와보니 공항에는 고모께서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고모는 저를 보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젠 한국에는 제가 돌아갈 집은 없었습니다. 커다란 트렁크 두 개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중학교 1학년인 제 모습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이 당시에 저는 이모 댁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IMF 시절에 어려운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었겠지만. 저 역시 추운 겨울날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 시절이었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을 갔기 때문에 집에서만 나태하게 지냈습니다.


아침이 되면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는 모습을 창밖에서 보아야 했고. 오후에는 돌아오는 아이들의 소리에 밖을 우두커니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운좋게 발견한 달력.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은 이모 댁에 있는 달력이었습니다. 그 달력은 무려 20년 치가 적혀 있었던 달력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큰 달력이 어딨어'라고 반문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운이 좋게 걸려있는 달력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상했습니다. 


10년 뒤에 내 모습은 어떨까. 

그리고 20년 뒤.. 이 달력의 끝엔 난 뭐 하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골돌이 하면서 한 가지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나이 30세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을 20년 잡고 해보자는 희망이었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매일 집에만 누워 있었던 시절에 그 달력은 제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30세에 MBA 학위를 받아야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물론 미국 MBA만 존재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행을 생각했던 시절이었지요. 


IMF 이후에도 좋지 않은 일들은 계속해서 찾아왔습니다. 남들보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꼭 유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전 학교에 비해서 친한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복학생이라고 놀림을 받더라도 1~2살 차이 나는 아이들과 '친구'로 다가섰었습니다. 다른 복학생들은 '존댓말'을 하지 않으면 때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모 댁에서 나와서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가정형편은 점점더 어려워져 계속해서 이사를 자주 다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2년에 한 번보다 더 짧은 주기로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저는 안정적인 주거공간에 대한 희망이 정말 간절했습니다. 


매년 언제든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IMF 때 겪었던 혹독한 경제상황 등 어린 나이에 몰라도 될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달력에겐 참 고마운 점이 많습니다. 


희망은 현실로.


 그 달력에 상상력을 더했던 일은 20년 뒤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가방 두개에 몸을 맡겨야 했던 중학생은 자신이 원하던 MBA를 받게 되었습니다. MBA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자신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더욱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양평으로 이주를 하면서 힘든 일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좋은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많이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힘을 합쳐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년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20년 후를 그려가며 함께 이뤄갈 희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김포공항에 내려 트렁크 가방 두 개만 세워 놓고 있었을 때의 막막함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비해서 지금은 덜 불안한 상황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귀촌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감사함'은 '희망'을 불러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국이 이렇다 보니 IMF 시절보다 혹독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단순히 직장을 다니기에도 명확한 답이 없고 퇴직을 하더라도 책임은 너무 크게만 느껴집니다. 취직 준비와 취업 성공 역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기부여는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질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만들어줍니다. 제게 달력 한 장의 희망이 있었던 것처럼. 분명히 내 안에 있는 동기부여를 찾고 믿어보시면 어떨까요?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신 분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소중한 추억을 다시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이상 양평 김한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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