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평김한량 Nov 08. 2017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공평은 오히려 불공평을 불러온다. 

 우리는 불공평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평한 기회를 소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반대로 불공평한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공평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모두가 똑같은 출발선 상에 있는 것처럼 착시현상을 겪도록 합니다. 


만약 같은 출발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는 차를 끌고 누구는 비행기를 끌고 대기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 문제를 볼 때. 원래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작해야만 오히려 불공평을 공평의 기회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출발을 똑같이 했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달리는 사람과 비행기를 타고 나르는 사람은 같을 수 없습니다. 


대학입시 그리고 취업. 


저는 인간의 삶이 원래 불공평하다는 것을 '달무티'라는 카드게임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마을의 어린 친구에게 배운 게임인데 이 게임을 할 때마다 정말 인생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식 명칭은 "위대한 달무티"이다. 좀 더 비꼬아서 얘기하자면 높으신 달무티.(…) 사실 게임 배경 자체가 풍자적인 의미가 강하다. 카드게임. 매직 더 개더링의 개발자로 유명한 수학자 리처드 가필드가 만들었다. 전용 카드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3벌이 있다면 이걸 전부 쓰면 가능하다 [1]. 근데 트럼프도 한 벌밖에 없다면? 그때는 계급투쟁을 하면 된다. 별반 룰이 다를 게 없기 때문. 대략적인 스토리는 흔히 있을 법한 중세 이야기이다. 달무티라는 폭군과 높으신 분들이 폭정으로 나라를 말아 잡수고, 아래에서는 신분상승을 위해 전력투구한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대비해야 할까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서 미래를 대비하는 방법도 함께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대학만이 살길 인가? 


 대학을 다니는 것만이 살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교육을 받게 되면 정말 대학이 전부처럼 모든 것이 결정되어 갑니다. 막상 졸업해보면 정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명문대이던 그렇지 않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업에서는 이제 초년생보다는 경력직을 더 환영하는 추세입니다. 


보수적인 기업 문화에 비해서 대학교육은 더 보수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업에서도 대학교육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공부하고 취업 준비를 해보지만 결국 밀려오는 것은 허탈한 마음뿐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우리는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교과서 혹은 문제지의 해답처럼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사회는 두 걸음씩 나아가고 있음에도 교육은 한 걸음씩 퇴보하는 양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의 대응만이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 것처럼 보입니다. 


무조건 안정의 희망. 


 우리는 북유럽식 복지를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북유럽과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먼저 자연환경이 다르고. 교육이 다릅니다. 그리고 복지혁명을 일으킨 시기도 다릅니다. 그들이 60년 전부터 준비하고 실행한 것을 우리가 따라가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것만 바라보고 살기엔 청년의 시기는 짧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만의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70년, 80년대의 방법으로 경제발전을 할 수 없으며. 대기업이 경제의 부를 독점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경제상황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우리나라만의 시행착오도 겪는 일만 남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삶을 존중받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력에만 집중하던 시기엔 '나의 삶'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탄탄한 기반에서 무언가 시작하는 것은 용납받을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오직 정부의 눈치만 보아야 하던 시기도 지났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글로벌 서비스로 론칭할 수도 있습니다. 


고용안정을 외치는 상황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전이 부정적인 것일까? 


 무언가 도전을 하게 되면 우리에겐 부정적 이미지부터 생기게 됩니다. '튀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이상 가만히 있는 것이 미덕처럼 보입니다. 도전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거나 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의 긍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이 도전은 무엇이든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절대 대학을 졸업하고 해서는 늦습니다. 그래서 여러 도전을 하는 사람이 자퇴를 선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과정이 힘들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포기를 하지만 않는다면 실패로 인한 피드백을 얻거나 성공의 과실을 따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도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도전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전은 그렇게 두려워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한 살짜리 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태어나서 '응애' 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이것은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단지 처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기도 하는 것을 어른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공평한 룰을 만들어라. 


 누군가 만든 룰에 너무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불공평 요소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공중도덕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안정성을 위한 법제도를 어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지켜져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강제적인 교육이나 인생이 걸린 문제에서 결코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걸린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결정되곤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내가 모두 감당하게 됩니다.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스스로가 자신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공평하게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선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가 물속인데 나는 코끼리 일 수 있습니다. 그런 룰은 거부하고 나에게 맞는 룰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인간의 숫자만큼 존재합니다. 모두가 나이키를 입는다고 해서 나이키를 입을 필요가 없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고 해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 맞는 삶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발견은 스스로 찾아 떠나야 하는 모험과도 같습니다. 


겁내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 


 사람에게 이기지 못할 시련은 없다고 합니다. 단지 겁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폭풍이 지나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젊음을 잃는 순간까지도 막연한 시간을 보내도록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결코 그렇게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모든 것이 균형 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나는 동시에 이 세상 어딘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도구도 존재합니다. 전 세계에서 작은 대한민국이라는 일부분에 모든 것이 다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행복에 대한 개념'을 '필리핀'에서 배워 온 것처럼 무언가 다른 곳에서 나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내가 찾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그냥 찾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없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N포세대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것을 찾을 기회도, 시도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N포세 대가 머지않아 40대, 50대가 되는 시기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동화 속에나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을 내가 '없다'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 


 세상은 공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인간이 지배하는 부분이 크지만 어떤 생물은 잠자리로 태어나고 강아지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에 맞는 삶이 부여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잠자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해 한탄하기보다는 마음껏 세상을 비행하며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모두가 명문대에 입학해서 졸업하는 것.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 사업에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것 등을 꿈꾸어서는 곤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원하고 꿈꾸는 것이 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만 꿈꾸다가 세상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비정상 적인 경쟁을 용납했기 때문에 모든 부조리가 존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원하지만 얻을 수 없기에 일단 놔두고 언젠가는 내가 얻어야 하지 하는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쟁을 부정해야 하며. 각자의 삶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 아닌 각자의 삶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충분한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엔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이상 양평 김한량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신의 생각대로 산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