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면서도 불안한 사회.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녔던 교회. 그곳에서 저는 당연히 종교를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임원 활동을 하고.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했습니다. 전도상을 받고 전도에 힘쓰며. 다른 사람을 위해 매일 일어나 중보기도를 했으며. 성경 통독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결혼 후 의문이 들었습니다.
믿음은 조직 안에서만 가능한가 였습니다. 저는 기독교를 믿는 것보다 교회를 다니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에 가보기도 하고 불교 사원과 법당에 가보기도 했습니다. 브라만교 스님을 만나기도 하고 점을 치는 사람과 만나 인생에 대해 논하기도 했습니다.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아주머니와 한시간 동안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삶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돈에 대한 문제 그리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결핍된 모습이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부분은 다양한 관점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종교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으로 인해서 수천년동안 각 종교는 지금까지 존재했습니다.
종교는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목적에 모순이 생기게 되면 어떤 종교도 그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들도 대부분 그 당시엔 매우 파격적인 종교였습니다.
믿음과 의심 사이.
종교를 믿게 되면 무엇보다 믿음의 대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완전한 믿음이 아닌 경우엔 믿음이 아닌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의심은 믿음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더라도 늘 불안에 흔들리게 됩니다.
물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떤 종교에서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질 자체는 어떤 것이든 영원할 수 없고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삶 가운데 사랑의 중요성을 가장 잘 가르치는 것도 종교입니다.
믿음은 변하기도 합니다. 믿음에 대한 대상이 변하거나 내가 변하게 되면 그 믿음은 깨지곤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한번의 믿음으로 족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합니다. 종교 자체도 세상의 변화에 따라 지혜로운 변화가 필요하며. 믿는 사람도 세상이 변하더라도 종교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것은 늘 큰 감동이 있습니다. 다른 말보다 그 삶 자체가 믿음이라면 누구나 그 종교를 믿고 싶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케팅을 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고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순수한 믿음에 대한 모습만으로도 종교가 존재해야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최근들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청년 이하 세대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청년 세대가 물질만을 사랑해서 혹은 현실 자체가 힘들어서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답은 틀렸습니다. 단지 기존에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삶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원인입니다.
종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을 이야기 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모두가 세상사가 힘들고 희망이 없을 때. 처세술이 득세하고 불신이 가득한 시대에 진정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종교들은 수천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간혹 종교 생활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공통된 사항은 바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핵심 가운데 사랑이 비어 있음이 실망 원인이었습니다. 물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종교 단체라면 이미 그 목적은 다한 것으로 존재의 이유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에 대한 죄책감.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정죄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한 판단은 오직 신이 할 수 있음에도 각 사람들의 잣대로 인한 오해와 편견은 사람들을 지치게 합니다. 각종 규범은 사람이 진정 해방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 자체에서 모순됩니다.
믿음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 믿음이 무엇인지 오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은 절대적으로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믿음은 강해지기도 깨지기도 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만 보며 완벽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스스로 믿음에 대한 의심이 든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이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덮어두고 세월을 보내게 되면 해소되지 않은 것은 결국 불신이 싹트는 계기가 됩니다. 믿음에서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강제로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믿기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각 종교보다 중요한 것.
각 종교의 이름과 단체, 규모 등. 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전과 달리 불교와 이슬람등 타 종교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사랑과 존중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었습니다. 각자 믿는 것에 대한 존중은 필요합니다. 자신이 믿는 것만이 진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정죄와 다름없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믿음을 상대에게 권하고 싶다면 그저 자신이 받는 믿음의 대상으로부터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면 됩니다. 그것이 아닌 요란한 방법은 결국 빛이 언젠가 사라집니다. 본질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각자의 삶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염원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비대해지기 시작하면서 본질이 흐려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그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 안에 생명이 사라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는 곧 사랑.
사랑을 하게 되면 마음엔 충만함이 생깁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그 둘 자체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 역시 그 존재만으로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해야만 받는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주고서 돌아오길 기대기 마련입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우리 존재 이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고 모든 종교는 말합니다. 그 목적은 각자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그렇기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태어났다면 그 순간 모든 것은 준비가 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일하는 것 등. 자신이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탄생합니다.
단지 준비된 것들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이 불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 뿐입니다. 삶 속에서 모두가 깨닫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될일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로운 종교급 믿음의 탄생 내로남불
특히 완벽만을 추구하고 싶은 우리는 이 목적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세상에 준비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경쟁에서 뺏어야만 내것이 된다는 반대로의 믿음입니다. 그 반대로의 믿음은 강력한 힘을 지녔고 실재로 힘을 발휘했습니다. 세계에서 유래없는 경쟁사회를 만들었고. 힘이 있는 사람들만 더 갖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나의 자녀만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근본적인 문제의 접근 보다는 내로남불 식으로 모든 것들이 처리되었습니다. 남은 몰라도 나만 잘되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분위기였고. 모두가 경쟁밖에 모르게 되었습니다. 90 프로가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10만을 위한 세상을 90프로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믿어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가는 중요합니다. 모두가 사회에 대한 믿음과 종교 안에서의 사랑이 충만했다면 이런 현재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회도 종교도 목적을 상실한채 다른 믿음을 함께 추구했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그곳에 사람들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결론.
종교에 대한 고민은 30년을 생활하고 나서야 뚜렷한 관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종교를 믿고 싶었지만 믿지 못하는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과 행복추구를 위해서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으면서도 그 안에서 불행과 불신이 만연하면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각자에게 맞는 종교는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진리 역시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존중해야 하는 것은 종교는 모두 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종굔는 삶을 구속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자유를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좁은 곳이 아닌 트여있는 시각에서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해소가 됩니다.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결국 세상엔 사랑과 믿음은 필요합니다. 돈만으로 추구할 수 없는 것들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를 통해서 더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좀더 따듯한 세상이 되리라 기대해봅니다.
이상 양평 김한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