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조영자

by 이광

그대는

조영자


앉다 앉다

앉을 데 없어

빚더미에 앉아보고


되다 되다

될 게 없어

내 낭군 되어보고

이 세상

더 할 게 없어

서천꽃밭 꽃 따러 간


이 작품은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가락을 타고 읊어야 제맛입니다. 시조의 운율이 절로 귓전을 흘러 가슴으로 출렁일 것입니다. 초장에서 빚더미란 말에 그만 미소를 머금습니다. 하지만 빚더미에 앉아본 사람이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지요. 땅이 꺼질 것 같은 불안과 눈앞이 막막하던 기억이 되살아나 한숨이 절로 나오고 말 것입니다. ‘앉다 앉다/앉을 데 없어/빚더미에 앉’은 화자의 그대는 한때 고초를 무척 겪었을 성싶습니다.

초장에서 그대에게 초점을 맞춘 시선은 중장에 들어서며 화자에게로 옮겨집니다. ‘되다 되다/될 게 없어‘하고 늘품 없는 사내 모습을 계속 들추어내는가 싶더니 그게 아니군요. ‘내 낭군 되어’준 필생의 인연을 소중히 품고 있는 화자의 속내가 드러납니다. 낭군’이란 말은 아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남편을 대하는 호칭입니다. 화자는 젊은 날 자신 앞에 짠! 하고 나타난 그대를 떠올리고 있나 봅니다. 빚더미에 주저앉았던 날들은 이미 지나갔고 그 여파마저 물러난 자리엔 ‘내 낭군’에 대한 그리움만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종장으로 가면 시선을 서천 먼 하늘로 향합니다. 독자 또한 저 세상에 있을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군요. 혹 화자와 마찬가지로 잠시 허공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으신가요. 보고 싶을 때 펼쳐보다가 그리움을 꾹 누르며 덮어두던 사진첩 속의 사진 같은 시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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