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어쩔 수 없는/ 김정연

by 이광

바람, 어쩔 수 없는

김정연


그래 난 참 헤퍼서

바람 앞 깃발이지


어르다 흔들다가

끝내는 찢어놓지만

찢긴 채 한끝은 남아

그 깃대를 물고 있지


화자는 자신을 ‘참 헤퍼서/바람 앞 깃발이지’ 하며 자조 섞인 고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헤프다는 말 속엔 바람이라는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 일희일비하던 지난날의 성찰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약한 인간의 실상으로 ‘바람 앞 깃발’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불러옵니다. 깃발은 ‘바람 앞 등불’이라는 위기 상황뿐 아니라 바람이 일으키는 모든 상황에 직면하는 실체의 입장입니다.

중장에는 냉혹한 사회의 칼바람도 느껴집니다. ‘어르다 흔들다가/끝내는 찢어놓’는 야수 자본주의의 속성을 우리는 곧잘 보아오지 않았던가요.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그 과정에서 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거리를 뒹구는 패자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화자가 목격하고 체험한 바람은 더욱 근원적인 곳에서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이 시의 제목에서 이미 예감하게 되는데 ‘어쩔 수 없는’ 바람이란 우리가 일생을 겪으며 살아야 할 숙명을 이야기합니다.


종장 후구에 등장하는 깃대는 시의 함의를 더욱 깊게 해주는군요. 깃발은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가치, 깃대는 ‘찢긴 채 한끝은 남아’ 한끝이라도 물고 있어야 할 소중한 기반을 상기하게 합니다. 깃대가 없는 깃발은 떠돌 수밖에 없고 깃발을 잃은 깃대는 존재 이유를 상실합니다. 깃발은 깃대가 있기에 바람과 맞설 수 있고, 깃대 또한 펄럭이는 깃발을 위해 꿋꿋이 설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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