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김일연

by 이광

눈길

김일연


눈길 미끄러우면 한번 미끄러져 주자


엉덩방아 찧으니

닿을 듯 파란 하늘


웃으며

미끄러지자


살아있는 좋은 날



눈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눈길에 ‘한번 미끄러져 주자’는 겁니다. 그 순간 문장은 시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릅니다. 미끄러우면 미끄러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걸 애써 방지하려 합니다. 미끄러지는 일로 체통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반면 체통을 지키며 사느라 우리가 놓치는 것도 있습니다. ‘엉덩방아 찧으니/닿을 듯 파란 하늘’도 미끄러져 주었을 때 마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소 주위를 의식하는 경계심을 내려놓았을 때 눈에 비친 파란 하늘이 우릴 얼마나 평화롭게 하는지 경험해 보셨는지요. 날씨가 맑은지 흐린지 힐끔 눈길만 던지곤 하던 하늘과의 진정한 대면은 동심에서 이루어집니다. 게다가 미끄러지자 멋쩍어 웃는 실소가 아닌, 웃으며 행하는 미끄러짐은 그 당당함이 멋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웃으며 미끄러질 만큼 동심의 순수를 지닌 사람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귀한 사람입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만큼 좋은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좋은 날’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미끄러지라고 넌지시 부추깁니다. 어깨에 걸친 무거운 짐 한 번쯤 내려놓으라고 속삭입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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