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말은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무려 30년 전!!) '만화 고사성어'라는 책에서 배운 말이다. 그때 만화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봐서 자연스레 외워졌는데, 평상시 자주 쓰지 않는 사자성어라 잊고 있다가 오늘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다. 한단지보를 설명하는 만화는 이렇게 그려져있다. 시골에서 온 한 젊은이가 한단에 상경해서 보니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엄청 멋있어 보였다. 그 젊은이는 멋있어 보이는 그 걸음을 무작정 따라하려 애쓰다가 결국엔 한단의 걸음걸이도 배우지 못하고 자신의 걸음걸이 마저 잊어 기어서 고향에 돌아갔다는 그런 내용이다.
한국실정에 맞게 좀 고쳐 이해해보면, 사투리가 심한 경상도 사람이 서울에 살며 서울 말에 익숙해지다보면 서울말투도 경상도 말투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가 되어버리는 상황이랄까?(사투리를 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난 정겹고 리듬있는 사투리 톤을 정말 좋아한다!.) 대구에서 올라온 내 친구는 서울오면 사람들이 사투리 쓴다 그러고 고향에 내려가면 간지 을매나 됐다고 재수없고로 서울말 쓴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반대로 내가 대구에서 근무할 때 내가 대구 사투리를 따라 쓰면 그거 아니라고 타박을 들었고, 서울 본가에 와서는 습관대로 대구 사투리 섞인 말을 써서는 엄마한테 너 말투가 이상해 졌다는 소릴 들었다. 이도 저도 아닌 짬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십 대 시절,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사진 찍기였다. 카메라 뷰 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대곤 렌즈를 잘 받치고 있는 그 사진을 찍는 모습을 동경했다. 예쁜 사진을 찍고 싶었고, 큰 카메라로 아웃포커싱 슁슁 날린 사진이 멋있어 보였다. 지역 동호회까지 가입하며 한동안 사진에 심취했었다. 처음엔 하이엔드 똑딱이로, 그다음엔 펜탁스 필름 카메라로, 그다음엔 후지 S3pro가 내 사진기였다. 사무실에서 행사 때 마다 사진찍던 니콘의 플래그쉽 D3까지 하면 정말 여러 카메라가 내 손을 거쳐갔다.
사진에 대해서 배우기도 하고 함께 사진 찍으러 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아, 지역 동호회에 가입했다. 가보니 50대 아저씨도 계셨고, 내 또래 친구, 언니들도 있었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아주 작고 귀여운 스타일의 A 언니였는데, 그녀는 굉장히 본인만의 매력이 확실한 스타일이었다. 키가 175cm나 되는 나와는 달라 그녀의 키는 160도 되지 않을 것 같았고, 처음 봤을 때 당연히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꿔볼 만큼 귀엽고 깜찍한 그녀는 패션 스타일만큼이나 사진에서도 '갬성'이 느껴졌다. 너무 예뻤고 너무 멋졌다. 나는 그녀의 재능이 그녀의 모습이 부러웠다.
그녀는 똑같은 장소에 출사를 가 사진을 찍어도 그녀만의 감성과 시선으로 멋진 사진을 담아오곤 했다. 나는 가끔 그녀를 쫓아다니며 흉내 내보려 했지만, 같은 장소 같은 곳에 렌즈를 들이민다고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카메라가 특별히 좋은 것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캐논의 보급기종을 사용했고 후보정 작업을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확실한 스타일과 느낌이 있었다. 그녀의 사진에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내게 여러 팁을 알려주었고, 사진 구도나 포인트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녀와 계속 친하게 지내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 키와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스타일을 따라 해 보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비슷한 사진을 찍으며 놀아보기도 했다. 립스틱도 잘 바르지 않던 나는 그녀처럼 핑크빛 립스틱을 발라보기도 하고 발그레하게 볼터치를 해보기도 했다. 그녀가 했을 땐 다 귀엽고 예뻐 보이는 것들도, 내가 하니 70년대 촌스러움이 마구 날렸다. 그녀는 어색해서 그렇지 자꾸 하면 괜찮아진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괜찮아 지진 않았다. 이십대의 나는 아직 나 자신만의 스타일 같은 건 모를 때였고, 그저 내 눈에 예뻐 보이는걸 따라 할 뿐인 따라쟁이었다.
그녀와 같은 색 립스틱을 바른다고 그녀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키 175cm의 어깨 떡 벌어진 여자였고, 그녀는 오히려 초등학생에 가까운 몸이었다. 큰 키를 장점으로 살려 오히려 자신감 있고 당당한 모습을 추구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저 내가 동경하는 모습을 따라 하고 싶었다. 어울릴 리 없고, 내 몸에 맞았을 리가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스타일을 동경하며 따라하기 시작하자 내 사진에서 뭔가 모를 아쉬움과 부족함이 계속 느껴졌다. 그녀를 따라하니 오리지널만 못하고 내 스타일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날 부턴가 나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 취미가 더이상 재미 없어졌다. 그 후로 장비를 다 정리하고 더 이상 사진을 찍으러 다니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다. 예전부터 내가 못 가진 것에 욕심을 냈다. 내가 못 가진 창의성, 예술적인 감각, 감성 이런 것들이 갖고 싶었다. 나의 장점인 정확성, 꼼꼼함, 책임감 이런 건 언제나 중요하지 않고 시시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쁜 사진, 멋지게 쓴 글. 그런 것들이 결국 나라는 것을 표현한다. 표현력이 부족한 나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나의 하루도 어떻게 예쁘게 사진으로 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미 20대에 겪어 봐서 이제는 안다. 그게 부럽다고 남 따라 하다간 그 뒤 꽁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나만의 스타일 나만의 개성을 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고민이 참 많다. 나만의 콘텐츠, 나만의 색을 찾는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고 분명 내가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내 중심을 찾지 않으면 한단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던 청년처럼 내가 가진 특별함 조차 다 잃어버릴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잘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