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의 나는 누구일까
도쿄-<지명> 일본 간토(關東) 지방의 남부, 도쿄 만에 면하여 있는 도시. 일본의 정치, 문화, 경제, 공업, 교통의 중심지이다. 일본의 수도이다. 면적은 2,166㎢. (출처:네이버 국어사전)
나는 도쿄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보고는 싶다. 영화는 도쿄에서 벌어지는, 별개의 세 가지 에피소드가 엮인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 모두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과 개성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니 도쿄에 관한 공통적인 생각과 느낌으로 영화작업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도쿄'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각각의 감독이 도쿄를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우리 눈에는 개별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다뤄지는 도쿄는 상당히 외롭고, 매혹적이고, 미친 도시- 그 어느 곳보다 다채롭고 이국적인 도시, 또 한 편으로는 상당이 익숙한 도시로 비춰질 것이다.
공드리가 바라본 도쿄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도쿄에서의 공드리는 어떤 모습일까. 공드리의 첫 번째 영화를 보고 왕가위의 영화가 떠올랐다. 도시의 화려함 이면에 존재하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건조함과 어두움. 여기에 공드리 특유의 리듬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추가된 도쿄는, 꿈과 포부가 없다고 여겨지는 한 청춘이 자신에 대한 존재의 유무를 자문하는 안개가 낀 공간이다.
주인공 히로코는 친구인 아케미의 집에 얹혀살면서, 영화감독이자 자신의 철없는 남자친구인 아케라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어쩔 땐 그냥 멍하니 잡지나 오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자기 나름으로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은 것들이다. 친구에게 의지하여 붙어사는 것도 너무나 눈치가 보여서, 하루 빨리 방을 구하려고 밤낮을 돌아다니지만, 도쿄 내에서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다. 돈이라도 벌기 위해 남자친구와 같이 포장 아르바이트 시험도 봤지만, 남자친구는 붙고 정작 히로코 자신은 떨어졌다. 도쿄에 도착해서 한낱 아르바이트도 못 구하고, 집도 못 구하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그저 아케라의 여자친구, 아케미의 민폐친구로 존재하던 히로코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고,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히로코는 의자로 변하게 되는데, 영화에선 의자로 변한 히로코가 인간 히로코 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쓸모가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전에는 겉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바빴던 히로코는 의자가 되고 나서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포장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정작 그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남의 집에서만 맘껏 취하는 의미없고 통속적인 취미에 불가하더라도, 인간보다 의자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더 명확하고 편한 히로코에겐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유익하고 행복한 활동이다.
공드리는 이렇게 넓고 화려한 도시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을 몽환적인 방식으로 주목한다. 인간이 의자로 변하면서 친구에게 해만 끼치는, 쓸모없는 존재에서, 하고 싶은 걸 전부 하며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된다 라는 결말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우리네 현실을 은유하는 것 같아 쓸쓸하기만 하다. 나를 예쁘게, 쓸모있어 보이게 포장하기만 하는 안타까운 청춘의 끝을, 귀여운 방식으로 상상한 공드리의 '도쿄'는 그냥 이랬다. 딱 공드리 같았다.
다음이 문제다. 이 양반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내가 드니 라방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피소드 <메르드>에서의 드니 라방은 가장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의 완전한 아티스트로 존재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 전신 누드까지 마다 않으며 정말 광인[狂人]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드니 라방의 열연과 레오 까락스의 독특한 연출로 만들어진 <메르드>는 가령 풍자극이라 말하자면 정말 도발적인 풍자극이다.
영화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다. 5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괴수영화 시리즈, 고질라에 나올법한 음악이다. 도쿄에 관한 영화라는 것을 한껏 의식한 듯, 일본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부터 이런 사운드를 사용한다. 웅장한 음악으로 긴장감이 고조되고,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며 영화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웬 왜소한 이상한 남자가 맨홀 뚜껑을 열면서 나온다. 그는 광인[狂人]- 메르드 이다! 광인은 도쿄 시내의 길거리를 마음껏 활보한다. 사람들의 담배를 뺏어 피우기도 하고, 꽃을 뺏어 먹기도 하고, 돈을 훔쳐 먹기도 하고, 여자의 몸을 핥기도 한다. 그냥 미친놈이다. 메르드의 횡포는 점점 심해져 이제는 도쿄 시내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어나갔고 메르드는 잔인하게 쌓인 시체들을 밟으면서 거닌다. 영화 초반 고질라가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와 다를 게 없었다. 메르드는 고질라 보다 더 흉악한 행동을 일삼으며, 고질라 이상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메르드의 폭탄 테러 이후, 도쿄 경찰 당국은 하수구에서 알몸의 메르드를 검거한다. 메르드는 곧 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기 시작하는데, 재판에선 메르드가 왜 테러를 감행했는지 등을 묻는다가, 곧이어 쓸 데 없는 소리로 가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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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죄 없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난 인간이 싫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죽이면 되지 않소!
"난 살아있는 게 좋다 바보야."
"인간 중에서도 일본인이 가장 역겹다."
"나의 신이 내게 일본에 살라고 강요했다. 나의 신은 늘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들 속에 날 던져넣는다."
"신이 내게 거울을 금지했다. 난 나의 모습을 모른다. 그러나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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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판에서 도발적인 발언을 마구 한 메르드는 결국 교수형에 처한다. 그러나 형 집행 후에, 메르드는 갑자기 사라진다.
대강의 시놉시즈는 이렇다. 정말 까락스는 겁이 없는 예술가이다. 일단 먼저, 메르드는 누구일까. 메르드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과거를 은유하는 것 같다. 메르드가 거주하는 하수구에는 탱크와 욱일기, 여러 수류탄과 총탄 등 전쟁을 일삼던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 보인다. 메르드는 그 남은 수류탄으로 도쿄를 테러했고, 그것은 일본이 여러 나라를 침략해 제국주의 정책을 실시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하수구에 처박혀 있던 제국주의의 잔존이 메르드에 의해 현재의 도쿄를 테러한다는 뼈대는, 영화 후반부의 재판 시퀀스와도 매우 연관이 있는 듯 하다.
"나의 어머니는 성녀였고, 당신들은 나의 어머니를 강간했다. 따라서 나는 당신들의 아들이다." 법정에서 메르드가 한 발언. 표면적으로 굉장히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한 편으로는 지극히 노골적이면서 파격적으로 영화의 테마를 정의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그대로 읽어도 해석이 된다. 메르드는 지하에 잔존해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자식이다. 메르드가 살고 있었던 하수구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때 제국주의를 일삼으며 많은 사람들을 학대하고 죽였던 일본의 과거가, 지금의 도쿄를 테러한 이 미치광이의 현재를 심판하는 행동- 자식이 부모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사형선고를 때려버리는 꼴이다. 본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인 법, 영화는 여기서 생겨나는 이 모순에 주목한다.
메르드가 일본의 자식이자, 제국주의 국가의 과거가 완전히 투영된 인물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 위에 나오는 법정 신에서의 대사도 색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신이 내게 거울을 금지했다." 이는 즉 나 자신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하고, 국가가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것임을 의미한다. 어쩌면 메르드는, 제국주의였던 과거의 역사를 조명하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은유하는 듯 하다.
메르드의 판결을 둘러싸고, 일본 내에서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 메르드에 대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다. 메르드의 사형을 요구하는 우익 단체들과, 메르드에게 자유를 달라는, 메르드를 추앙하는 부류들 등으로 나뉘는데. 자신의 과거를 묻으려는 우익정당과,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고 숙연하게 받아들이려는 또 다른 집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물론 영화 속 메르드의 횡포는 제제되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까락스가 바라본 도쿄는 이렇게 충격적이었다.
메르드가 사라지고 나서, 이번엔 메르드가 뉴욕에 나타날 것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레오 까락스가 이번엔 미국의 역사를 겨냥한, 얼만큼 노골적이고 대담한 풍자극을 만들려 하는지 궁금하다.
+이 메르드라는 아이디어, 즉 까락스의 연출과 드니 라방이 묘사하는 광인의 조합은 어떤 영화, 어떤 상황에 가서도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까락스의 13년만의 장편 복귀작 <홀리 모터스>에서도 드니 라방의 광인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 '광인'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전세계 영화인의 공동된 자산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본다. 그만큼 무궁무진하고 강렬한 소재이다.
개인적으로 봉감독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봉준호가 잡아내는 이미지들이 너무 좋다. 에피소드 <흔들리는 도쿄>에서의 이미지는 특히나 더 그렇고, 다른 영화들보다 동질감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잔잔하고 무심히 그려낸 듯한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 그런 것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에는 한 히키코모리와 피자 배달원이 나온다. 히키코모리는 남자이고, 피자 배달원은 여자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흔들리는 도쿄> 는 히키코모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에게도 히키코모리 기질이 없지 않아 분명히 있으니까. 이 영화에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히키코모리 남자와 피자 배달원을 묘사하는 방식의 차이다.
히키코모리 남자는 철저히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서서 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된다, 배달원의 얼굴은 보지 않고 음식만 받는다, 햇볕에 닿는 것은 싫은데 햇볕을 보는 것은 좋다, 휴지심으로 손바닥에 만들어놓은 이 동그라미가 사리지는 데 얼마나 걸릴까 등. 히키코모리가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데 있어서 아주 현실적인 노하우와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보낼까와 같은 일상적인 잔상들이, 영화 속 히키코모리의 생활 전반에 고루 녹아있다.
반면에 피자 배달원을 묘사하는 방식은 완벽하게 만화스럽다.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는 버튼을 달고 다니는 인간, 한 쪽만 보이는 가더벨트, 헬멧을 벗으면 드러나는 양갈래 머리 등 만화 캐릭터에서나 볼 수 있는 설정이 드러난다. 즉 영화 내에서의 히키코모리는 '인물'로서 다루고 있지만, 피자 배달원은 '캐릭터'로서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영화제목은 shaking tokyo 흔들리는 도쿄이다. 도쿄에 지진이 일어난다. 지진의 속성은 급격한 움직임- 누적된 변형 에너지가 갑자기 방출되면서 지각이 흔들리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도쿄에서의 지진은 언제 일어나느냐. 히키코모리가 피자 배달원과 만날 때, 총 두 번 일어난다. 일상적 삶에 있어서, 히키코모리의 잔잔했던 감정에 있어서- 즉 영화의 흐름에 있어서 흔들리는 변화의 원인이 바로 피자 배달원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이다. 인구밀도는 높은데 오히려 외로운 도시, 사람들은 많은데 결국 아무도 없는 도시, 봉준호가 바라보는 도쿄는 그런 도쿄였다. 피자 배달원에 대한 관심으로 집밖으로 나선 것,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람에 대한 사람의 그리움으로 남자가 여자를 찾아나서는 서사를 이루고 있다.
히키코모리들은 밝은 날을 싫어하지만, 영화의 배경은 언제나 밝은 날의 한여름이다. 이따금 한 번쯤은 비가 오는 날이 있는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밝은 날이 더 좋아보이더라. 나는 원래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했는데, 봉준호에게 설득당해버렸다.
전화기가 떨어지는 소리, 자전거가 떨어지는 소리를 기점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숏이 바뀌는 연출이 눈에 띄였다.
주인공은 집 안에서만 기계적인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바깥 세상의 그녀 또한 기계와 다름없는 것 같다.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은 존재한다. 가령 피자를 시켜먹는 사람과 피자를 배달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알아본다면, 별다를 거 없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내성적이고 똑같이 속세의 세상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며, 똑같이 사람들과 부딪히며 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외향적인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자신에게 솔직하냐/ 솔직하지 못 하냐의 차이다. 영화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이러한 인간적인 속성을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피자 배달원과 피자집 사장님이 히키코모리의 집을 '완벽한 공간'이라고 감탄하는 것도, 그들 모두 내성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차하면 나도 히키코모리가 되는 거니까.
모든 사람들에겐(아무리 외향적으로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성적인 성향, 히키코모리 기질이 존재한다 라는 설정으로 영화 속 온 도쿄는 히키코모리 상태로 존재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만화같은 상황에서, 봉준호는 자신이 도쿄에 품고 있었던 막연한 인상을 조그맣게 표현한다.
-"너보다 훨씬 더 내성적이다 이 개새끼야!"
-"히키코모리가 히키코모리를 만나려면, 방법은 하나 뿐."
-"지금 안 나오면, 평생 못 나와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대사 세 가지 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감각적으로 그려낸, 봉준호 영화의 결말이었다.
평점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