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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해 Jan 09. 2016

헤이트풀 8

기념비적인 타란티노 영화-장르적, 통속적 비평

#브런치 무비패스


THE HATEFUL EIGHT

(8번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작품)


타란티노의 8번째 영화가 나왔다. 이제 딱 두 편 남았다. 그는 영화 10편 만을 만들고 영화감독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바가 있다. 영화감독은 젊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직업이라 생각하기에, 그 때문에 딱 10편만 만든다고 한다. 어찌 됐건 타란티노의 8번째 장편영화인 <헤이트풀 8>은 10편의 필모그래피 막바지임에도 불구하고, 청년시절 데뷔작의 천재적인 감각과 젊은 센스를 여전히 생생하게 구사하고 있다. 오히려 아가사 크리스티의 플롯을 차용해 새롭게 변주함으로서, 더욱 더 독창적이고 정교한 이야기를 발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영화에 풍기는 한층 더 세련된 서스펜스는 덤이다.

+


내가 <헤이트풀 8>을 보통의 타란티노의 최신작보다 더욱 특별하게 아끼는 이유는, 데뷔 때부터 구축해온 자신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나름의 영화 속 세계관을 한 데 집합시켜놓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영화에 적용시킨 소설가의 구성 방식,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저속하면서도 톡톡 튀는 대사, 그저 취향의 문제라는 듯 대가리와 거시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터트리는 대담함, 극도로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 수다로 구사하는 헤모글로빈 액션, 사무엘 L. 잭슨이 시원하게 내질러주는 엄마 뻐꾹(mother fucker), 제멋대로 변형시킨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 뻔뻔한 내레이션의 난, 수다의 신이 사용하는 노란색 자막, 플래시백 없는 비순행적 스토리텔링- 이 모든 것을 눈보라가 치는 하얀색 설원에 응축시켜놓았다니, 정말로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좀 더 자세한 리뷰는 VOD가 나와야 가능하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영화에 대한 글을 몇 자 남겨본다.




타란티노는 장르를 다루는 솜씨가 특출 나다. 마냥 장르영화를 만드는 솜씨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장르영화를 정말 유니크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어느 곳에 가건 최고(best)는 있지만, 유니크(unique)는 드물다. 전 세계에서 타란티노 영화는 타란티노밖에 만들 수 없는 이유이다. 보통 타란티노가 장르영화를 만든다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_ 하이스트 무비, 웨스턴 장르, 수위 개쩌는 액션, 종일 재깔거리는 복잡다단한 대중문화 등이 있는 <헤이트풀 8>은 그중에서도 웨스턴 장르에 속하는  듯하다. 굳이 고르자면 웨스턴 장르인 거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이전에 타란티노가 만든 웨스턴 무비나, 기존에 있었던 서부영화와는 조금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 이렇다.


보통의 스파게티 서부극은 희극적 잔인성, 으스스한 유머, 강렬한 태양 빛 아래에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대지, 질겅질겅 시가를 씹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찡그린 얼굴(?),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 총 싸움질 보는 재미(?) 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헤이트풀 8>은 독특하게도 웨스턴 무비의 보편적인 장르적 쾌감과 특징을 말끔히 죽인 채 영화를 전개한다. 일단 영화의 배경은 총싸움을 할 수 없는,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눈보라가 치는 설원과 고립된 산장-밀실이다. 또한 9명 모두가 산장에 고립되었을 때, 존 루스(커트 러셀 역)가 인물들의 총을 빼앗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애당초 싸움의 씨앗을 제거해 버리는 것. 화끈한 총싸움을 기대하며 온 관객은 "뭐야 총을 뺐으면 총싸움을 못 하잖아!" 이런 식으로 약간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면 총싸움도 안 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도 없고, 3시간 동안 도대체 무얼 하느냐? 3시간 동안 입만 턴다. 실제로 러닝타임의 90퍼센트 이상은 인물들이 주고받는 수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떻게 보면 웨스턴 장르인 전작 <장고:분노의 추적자>보단,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의 형제 격인 영화로 보인다. 내가 보기엔 웨스턴 장르는 그저 인물들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한, 표면적 차원에서만 쓰인 것 같다. 하긴 뭐 워낙 변덕스러운 이 양반이 같은 장르를 연속으로 두 번이나 만들었을 리도 없겠지만.

+설원에 고립된 잡화점과, 남북 전쟁 전후의 상황, 다양한 인종이 한 데 모인 설정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영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측하는 이 영화의 텍스트. 하지만 이 글에선 스타일적인 측면만 다룰 거다.


전작의 웨스턴 무비, <장고:분노의 추적자>가 순수하게 찍어낸 시각적 자극_ 말초신경을 남김없이 조지는 장르적 쾌감이 주였다면, 혹은 그러한 화끈한 액션이 보였다면, 이번 (거의 정통 웨스턴 무비가 아닌) 웨스턴 무비 <헤이트풀 8> 에서는 극도로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에서, 긴장감 넘치는 대화나 독백의 형식으로 새로운 액션의 미학을 제공한다. 이름하야 주둥이로 구사하는 '헤모글로빈 액션'이다. 3시간 내내 입을 털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여섯 개의 챕터를 만들어서 영화의 흐름을 창작자 마음대로 적절히 유지하고 조절하다가, 적절한 타이밍, 필요한 때에만 이따금 인물의 머리를 박살 내거나 거시기를 터트린다. 특히 마지막 교수형으로 매달아 죽이는 장면은 압권. 감탄이 나오더라. 정교한 플롯과 수다만으로 완벽하게 구사한, 그저 자극적인 이미지의 연속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영화미학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을 저렇게 쉽게 죽여도 되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타란티노의 영화는 이렇게 대답한다. '쉽게 죽여도 된다.' 

타란티노가 영화 속에서 헛소리를 많이 한다지만, 지극히 통속적인 장르를 많이 다루는 것도 맞지만, 언제나 폭력적인 영화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맞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는 현실의 폭력을 다루고 있다. 테러리스트가 비행기를 납치하는 스펙타클한 상황보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커플이 뒤엉켜 싸우는 그런 황당하고 현실적인 폭력에 주목한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적인 그의 영화 세계에서, 주인공이 영화 시작부터 죽는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에이 설마 저렇게 쉽게 죽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에선 진짜 쉽게 죽인다. 존 루스가 커피를 마시고 코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에서 사무엘 잭슨이 쏜다고 하면 그건 그저 같잖은 총으로 위협하는 게 아니다. 진짜 쏜다. 그것도 머리를 박살 낸다. 그게 현실적인 거다. 어쭙잖은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고 앵글에 잡히지도 않는 엑스트라 꾸겨 넣는  것보단 나은 것 같다. 무조건 영화적일 필요가 없는 것, 그게 타란티노 영화의 핵심이다. 내가 생각해보니 타란티노의 영화 속에서 비현실적인 것은 딱  하나뿐이었던 거 같다. 바로 비정상적으로 강한 위력의 대포알 피스톨, 딱 그거 하나.


타란티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성들이 몇 가지 있다. 챕터를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노란색 자막, 내레이션의 사용 등. 이렇게 타란티노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 영화임을 인정하고 즐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화와 소설, 연극이 합쳐진 복합적인 무언가 임을 관객에게 인지시킨다. 처음엔 어색할지 몰라도, 익숙해지면 이게 정말 죽이는 영화 관람의 장치가 된다.

+내레이션의 주인공이 타란티노 본인이라 한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속 타란티노의 목소리는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에서 타란티노가 각각 연기한 '미스터 브라운'과 '지미'역할이었는데 둘 다 목소리가 약간 모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또 하나는 <장고>에서 장고에게 죽임을 당하는 덩치 큰 백인 남자로 출연하는데 이상하게 거기선 목소리가 굵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왜 난 그 내레이션을 여자 목소리로 기억할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타란티노는 원래 영화배우가 꿈이었다. 하지만 점점 감독이 멋있어 보여서 영화감독이 됐다고. 그는 로만  폴만스키처럼 영화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자기 영화에 조연, 혹은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하고, 로드리게즈 영화에는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헤이트풀 8>에서는 내레이터로 영화 안에 등장했다니. 정말 재미있게 영화 안팎을 넘나들며 사는 것 같다. 부럽다.


배우들의 연기도 완벽했다. 사무엘 잭슨은 말할 것도 없고, 윌튼 고긴스와 커트 러셀은 캐릭터를 정말 제대로 잡았더라. (특히, 윌튼 고긴스의 과장된 연극톤) 타란티노의 페르소나 격인 팀 로스와 마이클 매드슨 또한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잘 연기해주었다. 그리고 제니퍼 제이슨 리, 커트 러셀과 꼭 붙어 다니던 밤탱이 눈의 죄수 말이다. 영화의 스토리가 모두 그녀에 맞춰서 짜여 있는데, 그녀 역시 영화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에 크리스토프 왈츠도 출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왈츠의 끝내주는 대사처리를 듣고 싶었는데, 타란티노의 아홉 번째 작품에서는 볼 수 있으면 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산한 서부음악도 만날 수 있다.


데뷔 때부터 한결같이 유지해온 자신의 스타일과 장르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변형시켜온 그는, 진정 이 시대의 영화작가라 불릴만하다. 이 영화는 완벽하다.




평점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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