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해 Jan 12. 2016

영화 경멸

내가 두번 째로 보는 고다르 영화다. 영화가 많이 졸리다. 불면증이 있었는데 이 영화를 수면제 삼아 잠을 청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결국엔 새벽에 다시 깼지만.) 63년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세련된 미장센과 아름다운 영상미가 눈에 보인다.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에서 보여준 난잡한 구성과 점프컷의 남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한층 더 차분해진 카메라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냥 가장 처음 기억나는 감상이 이거였고, 어찌 됐건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영화와 예술, 작가주의의 발원인 누벨바그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고다르가, 자본과 영화, 그 사이에서의 예술가의 위치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이다. 영화를 찍는 장면을 찍는다. 근데 이 장소와 걸어가고 있는 배우는 실제로 <경멸>에 출연하는 배우이고 배경이 되는 장소다. 그리곤 보이스오버로 나지막하게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을 언급한다. 영화의 매커니즘을 바로 보여주는, 굉장히 실험적인 연출이다. 이렇게, <경멸> 또한 누벨바그의 영향 아래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대중적 영화라기 보단 창작자 본인의 자전적인, 혹은 개인적인 에세이로서의 영화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산업으로서의 영화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제작자의 횡포와 스타급 배우의 캐스팅으로 대변되는- 할리우드 영화에 반하는 반할리우드적인 영화라 말할 수 있는데 다음을 같이 알아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덩치 큰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제레미는, 역할 그대로 상업영화로서의 자본을 의미한다. '영화는 돈이 돼야 해.' '예술적인 건 돈이 못 돼." 뭐 이런 식으로. 그다음 폴의 아내였지만 폴을 버리고 제레미와 함께 로마 떠난 까밀. 까밀은 금발의 섹시 스타를 의미한다. 이는 곧 막대한 출연료를 챙기는 스타급 배우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들에 대한 고다르의 생각은 영화에서도 나오는 아주 노골적인 대사로 표현된다.

-"영화라는 게 대단하지 않아요? 차려입고 다니던 여자들이 영화에선 엉덩이를 내보이잖아요."

실제로 영화에선 까밀의 누드 뒷태도 나오고 제레미가 여자의 알몸이 나오는 신을 보고 관객들이 많이 보겠다며 좋아하는 장면도 있다. 고다르는 정말로 이들을 경멸하였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제레미와 까밀이 영화 마지막에 죽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마 경멸하는 대상에 대한 고다르 나름의 응징인 것 같다.


폴과 까밀의 갈등, 까밀이 폴을 경멸하게 되는 과정이 <오디세이>라는 영화 제작과 함께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서사이다. 폴도 바람기가 다분하고, 까밀도 제레미와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으니 관객들은 이 부부가 헤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느꼈을 것이다. 단순히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었기에.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고 본다.(영화의 줄거리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까밀이 폴을 경멸하게 된 이유는, 폴의 바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까밀이 예술가로서 더이상 폴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폴은 <오디세이>를 좀 더 상업적인 영화로 각색하기 위해 제레미에 의해 고용된 작가다. 좋은 아파트에서 까밀과 함께 살기위해 돈이 필요했던 폴은, 그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끝끝내 극의 마지막까지, 폴은 이것을 두고 갈등하게 된다. 순전히 상업적인 영화_ 자본의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린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끼는 것이다. 까밀은 이렇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폴에게 더이상 존경심을 가지게 되지 않고 이 때문에 오히려 폴을 경멸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프리츠 랑이 본인으로 출연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프리츠 랑에 대한 고다르의 존경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프리츠 랑은 영화감독이자 배우, 고전적이고 순수한 태도로 작가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고다르는 제레미와 대립하는 프리츠 랑을 통해, 계속해서 현대적으로 변화해가는 영화가 어떻게 고전으로 회귀할 수 있는지, 어떻게 순수한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심오하게 고찰하고 있다. 이는 곧 자신의 생각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레미-폴-프리츠 랑


영화의 시초는 예술이었다. 지금은 그 본연의 의미가 많이 변질돼서 굉장히 대중적이고 복합적인 그 무언가가 되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순수하게 영화를 만드는 태도에 대해 걱정했던 혁신적이고도 젊은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 영화는, 이제 현대 영화인들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아쉽지만 누벨바그는 이미 늪지대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매거진의 이전글 헤이트풀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