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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해 Feb 05. 2016

친절한 금자씨

 

 기존의 박찬욱 영화는 복수에 관한 윤리적인 딜레마를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경향이 있었다. <금자씨>는 영화 자체가 윤리적인 딜레마가 되도록 의도한다. 백선생에 대한 금자의 복수(혹은 과정)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백선생이 저지른 유괴와 살인, 그로 인해 금자가 감옥에 가게 되고, 그 이후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시선 또한 가지고 있다. 유괴된 아이들의 부모, 죽은 아이. 이들을 통해 영화는 기존 복수극이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패턴과 클리셰를 완전히 타파한다. 그들이 모여 영화는 하나의 윤리적인 실험실로 변하게 되고, 창작자는 이에 대한 윤리학적 딜레마와 능동적인 태도를 관객이 아닌 영화 안의 캐릭터에게 부여한다. (여기에 관객이 포함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 딜레마의 초점은 관객이 아니라 영화 속 남겨진 사람들에게 맞춰져있다.)

이를 지켜보는 재미는 박찬욱만이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영화가 미적으로 뛰어나다. 하지만 그게 역으로 단점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겐 스타일 과잉으로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타일 과잉은 텍스트를 흐리게 만든다. 영화를 읽어보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금방 접게 만든다. 그건 작가로서의 오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박찬욱 감독은 '금자씨' 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정복적인 태도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세계의 완벽한 통제다. 확신하건대 그것은 절제를 포함하기도 한다.

두부와 생크림 케이크, 하얗고 깨끗하게 살고 싶었지만, 복수의 끝맛은 시원하지만은 않고 찜찜하기는 하다. 그 실험에 참가한 나로서 느끼기에는.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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