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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향문 Jun 16. 2024

아이는 자란다









요 근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딱히 앞서 걸으려는 노력도 한 적 없으면서 그것도 모자라 자꾸만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핸드폰에 있던 SNS어플을 지우고 그밖에 울릴 만한 모든 알림을 꺼놓고 죽은 듯 책만 읽었다. 기계처럼 일어나 청소를 하고 기계처럼 아이와 게임 몇 판을 해주고 기계처럼 식물에 물을 주고 어항의 물을 갈고 다시 책을 읽었다. 평소라면 이런 침잠 또한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겠거니, 기꺼이 즐겼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마저 귀찮았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는 것마저 귀찮아서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고 납작 엎드려 남이 쓴 글을 주워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이가 오늘은 태권도까지 혼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그런 말을 해왔지만 내심 마음이 불편해 번번이 오늘만 같이 가자며 손을 잡고 따라나선 참이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1층까지만 같이 가줄까? 아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서더니 몇 초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와서는 무섭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만 같이 타 줄게. 1층까지 가면서 아이는 올 때는 혼자 올 거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어쩌지' 하며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엄마가 관장님께 전화해 둘게. 요 앞에서 내리면 돼. 공동현관을 나선 아이는 금세 돌아와 이 앞에까지만 나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공동 현관 밖으로 나가 아이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했고 나는 다시 알겠다고 했다. 


그제야 아이는 통통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뒤를 돌아보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가 눈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나는 곁길로 가 아이가 길을 잘 건너는지를 살폈다. 얼마 되지 않아 무사히 길을 건넌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이 좋은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처음으로 엄마 손을 잡지 않고 어딘가에 가는 것을 성공한 것이다. 나도 안심하고 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 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이러저러해서 아이가 혼자 오고 싶어 하니 돌아오는 길에 근처까지만 태워다 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관장님은 그럼 길을 함께 건너주시겠다고 했다. 바라던 바였다. 


통화를 마치고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이따금 내가 뒷걸음질 치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순간에도 아이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저 겁이 많은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아이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도,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일단 부딪히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참 괜찮은 애야, 나는 중얼거렸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을까. 참으로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오래도록 기억을 곱씹었다. 손을 흔들며 통통 달려가는 모습. 혼자 길을 건너는 데 성공하고서 들뜬 발걸음. 조금은 긴장한 표정. 처음으로 아이가 내 손을 잡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 이 순간을 잊지 않지 않으려고. 


그리고는 돌아와서 이 글을 쓴다. 언젠가 아이가 나처럼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보여주려고. 네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사랑스러웠는지 알려주려고. 이렇게 용감했으니 살면서 몇 번쯤은 덜 용감해도 괜찮다. 어린 너에게는 큰 전진이었으니 살면서 작은 몇 걸음쯤은 뒷걸음질 쳐도 괜찮다. 그런 걸 알려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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