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전제 조건, 퇴사. 그 고통스러운 2개월의 나날들.
23년 9월 말. 1년 만에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내 나이 한국 기준 32살.
학창 시절 친구들의 카톡 프로필이 결혼식, 아기 사진으로 채워질 무렵 오히려 나는 가장 안정적인 삶을 뒤로한 채 석사 유학을 결심했다. 독일 유학은 어쩌면 대학 졸업 무렵 세운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기도 했다. 25살 호주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해외 생활이 생각보다 나랑 잘 맞는구나, 작은 내 나라를 떠나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닫고 2년간의 자격증 준비, 4년간의 직장 생활 끝에 결국 20대 숙원 사업을 청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나에게 독일이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채택하지 않고서도 유럽에서 가장 탄탄한 산업 구조를 보유하고, 끔찍한 전후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반성하는, 건축과 철학의 아카이브가 풍부한, 이성적이고 차분히 질서를 유지하는 그런 나라. 더욱이 유럽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단기간에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메리트였다. 20대에 갈 수 있었던 배낭여행을 고이고이 모셔둔 이유였다까.
23년 3월쯤 아이엘츠 점수를 따고 4월부터는 정말 멘땅에 헤딩한다는 심정으로 온갖 네이버 블로그와 유투브 후기를 보며 석사 준비에 올인했다. 물론 준비성이 전혀 없는 나는 3월 중순 내가 지원하고 싶은 학과가 별도의 사전 서류 검증을 하고 그 기간이 2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급하게 잡은 유학원 상담을 통해서 알게 되고 1차 난관에 봉착했다.
언제나 내 발목을 잡는 건 나는구나 라는 자기혐오와 맞서며 1주일만에 간단한 서류를 확보한 뒤 난이도 극악의 공증 절차라는 2차 관문에서 거의 주저 앉을 뻔 했다. 중학교 졸업 증명서랑 성적표가 도대체 왜 필요한건지. 졸업한 중,고,대학교가 공립이라면 조금 더 수월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기관에 영어로 된 서류를 요청하고 학교장의 압인을 받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게 불가능하다면 직접 대사관에 독일 번역을 요청하거나 자체 번역 후 공증인에게 검증을 받는 방법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유학은 내 길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직장인으로서 오후 4시 전 주민센터를 간다거나 고향에 있는 중학교 행정실을 찾아가는 건 얼마 있지도 않는 휴가를 쪼개고 쪼개야 했다.
어찌저찌 극악의 서류 지원을 마치고 한 달만에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숙사, 항공권 등을 해결했지만 결국 대사관 비자 테어민 (예약)을 잡지 못해서 독일 입국후 해결하기로 했다. 7월 즈음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하고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갔다. 여기서 부터 3번째 난관에 부딪혔는데 이건 유학 준비와 별개로 내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지막 업보였다.
입사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이제 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직원들의 이름을 다 외워가는데 퇴사를 지른다는 건 프로이직러인 나에게도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고유 업무라 할 것 없이 이 일 저 일 다 나누어 하는 팀 특성상 나의 공헌도와는 별개로 팀원의 부재는 곧 업무 가중 의미했다.
당시 상황을 요약하자면 총 세명이 있는 팀에서 내가 빠져버리니 남은 일을 나머지 두명이 나눠야 하는 데, 까라면 까야하는 양육강식의 회사에서 결국에는 직급에 따라 일이 분배 되기 마련이다.
직장인이 제일 예민한 업무 분장에 있어서 극심한 손해를 보게된 직원과의 관계가 서먹해 진건 8월이후 부터였다. 꼬딱지만한 팀에서 나름 아슬아슬하게 회사 동료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제 곧 퇴사한다는 마당에 불편한 심기를 숨길 이유가 없게되었다. 높은 연차에 따른 강한 로열티를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나와 맞지 않는 점은 취미이자 특기가 가십 생성 그리고 전파라는 점이였다. 아마 유학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 때문에 나는 언젠가 부서이동이나 퇴사를 결심했을 거라고 장담한다.
결국 뒷처리를 해야하는 건 남은 직원들이니 나를 곱게 볼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의 강력한 수동 공격의 매개 였던 채팅을 통한 앞담화는 정말이지 마주 앉아 있는 8시간을 고통스럽게 했다. 사내 메신저를 통한 상사 및 동료에 대한 뒷담화가 직장 생활을 꽃이며 필요악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키보드가 부서질 듯이 하루종일 남 얘기를 전달하고 그걸 숨기지도 않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고인물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맹렬히 차지하며 회사의 물갈이를 방해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회사와 그들은 공생관계이므로 누구를 탓할 건 없다.
나의 3번째 퇴사는 인간에 대한 회의감과 일반 직장인의 현실 고충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업 정서와는 내가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통해 내 동료 였던 남아 있는 그들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인 내가 곱게 보일리도 없고 무책임하다고 느껴질테니 말이다. 물론 팀원 이외에 사람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동료들이 있으며 그들 중 한국에 간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일로 엮인 관계는 마냥 좋거나 나쁘기 보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입독 2주를 남겨 놓고 짧고 강렬했던 기업 생활은 이렇게 씁쓸하게 마무리 되었다. 이후 1주일은 제주, 1주일은 고향에서 알찬 시간을 보낸 나는 27인치 캐리어 두개와 꽉찬 백팩을 메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